언제든 탈 수 있던 지하철 1호선, 영원히 운행 멈췄다 [어쩌다, 커튼콜]

서지혜 기자 2024. 3. 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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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부터 달린 뮤지컬 '지하철 1호선'
학전 운영중단과 함께 운행 멈춰
황정민, 설경구 등 굵직한 배우 배출
김민기 대표 "관객이 찾아오면 계속될 것" 말했지만
건강 악화와 경영상 문제로 학전 문 닫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2003년 공연 모습. 사진 제공=학전
[서울경제]

언젠가 인터넷에서 ‘지하철 1호선 빌런’이라는 ‘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을 타면 볼 수 있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신기한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모은 글이었는데요. 지하철 천장에 달린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아저씨, 동남아 왕족이나 입을 법한 기괴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는 아주머니, 그밖에 너무 신기해서 한 번쯤 사보고 싶은 물건을 큰 소리로 팔며 지하철 첫 칸에서 끝 칸을 오가는 상인, 그리고 그 상인을 ‘잡상인’이라 부르며 ‘물건을 사지도 팔지도 말아달라’ 호소하는 기관장··· ‘지하철 1호선 빌런’은 지하철 1호선을 잘 타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짜뉴스’에 가까울 정도로 신기한 풍경이겠죠. 하지만 지하철 1호선을 매일 타는 이들에게 그들은 매일 아침 보는 일상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진 속 사람들 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인데··· 아마 만난 사람은 아니겠죠. 하지만 그런 옷, 그런 차림새, 그런 행동은 낯설지 않습니다. 2003년의 필자(저) 역시 인천에서 서울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통학하던 대학생이었거든요. 그래서 ‘지하철 1호선 빌런’이라는 인터넷 게시물의 제목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신기한가’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거의 매일 아침 보던 풍경을 ‘빌런’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어쩐지 못마땅했습니다.(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 언젠가 해본 적이 있는 거 같아요.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초창기 포스터

때는 2003년 혜화역. 지하철 역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한 포스터를 보고 멈춰 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목은 ‘지하철 1호선’. 제목이 왜 지하철 1호선일까, 지하철 1호선이 신기한 일이 있나, 라는 생각을 그 때도 했습니다. 저는 사실 당시까지 연극파였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혼자 종종 대학로에서 남몰래 연극을 보는 취미를 갖고 있었는데요. 아무리 연극파여도 대학로에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무려 10년이나 된 뮤지컬, 황정민, 조승우 등이 거쳐간 뮤지컬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소 놀랐고, 공연을 본 후에는 더욱 놀랐습니다.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지하철 1호선’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서민’ 혹은 ‘소시민’입니다. 연변에서 온 처녀 ‘선녀’가 본 실직가장, 가출소녀, 자해공갈범, 잡상인 등이 모여 살고 있는 서민의 풍경이 이 뮤지컬의 주요 배경인데요. 1998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IMF 당시 한국의 모습을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낸 ‘레뷰’ 뮤지컬이죠. 이 뮤지컬을 다 보고 난 후 저는 ‘너무 재미있다’라는 생각 보다는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보던 사람들을 세상은 ’서민'이라고 부르나보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거 같아요.

제가 공연을 본 2003년은 ‘지하철 1호선’이 공연을 시작한지 10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지금 ‘학전’이라 불리는 공연장은 당시 ‘학전그린소극장’이라는이름으로 불렸고, 그해 11월 2000회 공연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본 공연은 아마 2000회 직전의 공연이었을 겁니다.) 이후 한국에는 지하철 9호선, 분당선 등이 들어섰고, 세상이 바뀌면서 ‘지하철 1호선’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죠. 뮤지컬 ‘지하철 1호선’도 승승장구 했습니다. 원작 극단인 독일 그립스 극장 오리지널팀이 한국을 방문해 공연을 관람하고, (이 작품의 원작이 독일 작품이라는 사실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작품은 전국으로,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2021년 공연 모습. 사진제공=학전

‘지하철 1호선’이 세계 어디까지 달리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지하철 1호선’은 언제나 대학로 학전, 그 곳에 있었으니까요. 가끔 4호선 혜화역에 내려 ‘지하철 1호선’ 포스터를 볼 때면 “다음에 한 번 또 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지만 일상에 치여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었어요. 하지만 상관 없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은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는 공연이었으니까요. 1994년부터 2008년까지 총 4000회의 공연을 하고 공연을 중단했을 때도, 언젠간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서울역에서 제비를 찾는 연변 처녀 ‘선녀’와 걸인 ‘문디’, 운동권 출신 ‘안경’, 혼혈 고아 ‘철수’ 등은 여전히 지하철 1호선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들에게 지하철 1호선은 ‘발’이고, 누군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줄 것이라고 그저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지하철 1호선은 10년이나 운행을 멈췄습니다.

지하철 1호선은 2018년 4001회로 돌아왔고, 10년 사이 세상은 강산이 열 번 바뀐 것처럼 엄청나게 달라졌죠. 지하철을 탄 사람들의 손에는 신문 대신 스마트폰이 쥐어졌고, ‘지하철 빌런’은 지하철 1호선에서도 사실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하철 7호선, 9호선, 신분당선 등이 연장되면서 인천과 경기도에 사는 사람들은 더이상 지하철 1호선에 집착하지 않게 된 것도 큰 변화입니다.

저 역시 지하철 1호선을 타지 않아도 되는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고,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공감하는 사람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등장인물 선녀가 오가는 청량리역의 모습이 대표적이죠. (만약 이 뮤지컬이 TV로 방송됐다면 당장 청량리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불매운동을 벌였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선녀와 같은 여성을 ‘처녀’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학전은 공연의 주요 설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서울경제신문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한 김민기 학전 대표는 “작품의 내용이 20세기 말 서울 시민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작품은 그 시절의 풍속화로 남겨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며 “종이신문이 핸드폰으로 바뀐 모습, 운동권 대학생의 설정 등은 바뀌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동의합니다. ‘응답하라 1988’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애잔한 추억에 젖듯, ‘지하철 1호선’도 그렇게 우리의 소환하는 무대로 영원히 남겨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하철 1호선은 이제 정말 운행을 멈추게 됐습니다. 학전이 지난 15일부터 완전히 운영을 중단했기 때문이죠. 김민기 대표는 인터뷰에서 “공연은 관객이 찾아주시는 한 계속 되어야한다”고 말했는데요. 본인의 건강 악화와 경영상 문제 때문에 공연을 지속할 수 없게 됐다고 합니다. 사실 관객보다 학전을 거쳐간 배우들이 더 속상할 거예요. ‘배움의 밭’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공연장 이름 ‘학전’처럼 배우들 역시 이곳에서 배우가 되기 위해 지하철 1호선 속 등장인물들처럼 꿈을 꾸고, 꿈을 노래했으니까요. 지하철 1호선의 대표 배우였던 황정민은 '(김민기 대표가) 늘 기본에 충실하라며 박자 세는 것부터 가르쳤다"며 “학전은 원동력이자 초심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서 공연하는 배우 황정민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난 14일 학전블루소극장의 마지막 공연 ‘학전, 어게인 콘서트’에는 박학기, 노찾사, 권진원, 황정민, 알리, 정동하 등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학전에서 울려퍼진 마지막 곡은 ‘아침이슬’이었습니다. 김민기, 학전, 지하철 1호선. 모든 게 한국 공연 문화 역사의 고유명사입니다. 비록 김민기 대표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학전을 거쳐간 780여 명의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가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15일부터 운영을 중단한 공연장 ‘학전’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제 공연장은 ‘학전’이라는 이름을 빼고 ‘동숭동 1-79번지’라는 도로명 주소로 돌아갑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학전의 공간을 인수해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김민기 대표가 학전 명칭을 사용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7~8월 재개관하는 학전은 어린이들을 위한 전문극장이 될 예정입니다. 사실 학전이 지금과 같은 적자를 겪게 된 주원인은 어린이 공연입니다. 학전이라는 이름은 사라지지만 그의 생각과 철학이 그 건물에서 이어졌으면 합니다. 우리가 지금 비록 수천 석 관객석을 가득 채운 수십만 원 짜리 해외 명품 공연이 대중화된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래도 꼭 유지돼야 할, 존재해야 할 작품이란 게 있으니까요.

서지혜 기자 wis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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