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쓸어버려" 4시간 만에 504명 학살…복수 칼 간 미군의 잔혹 만행[뉴스속오늘]
[편집자주]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기관총으로 15명 정도 죽였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노인, 여자 그리고 아이들도 있었나요?"
"...네 그렇습니다"
1968년 3월16일 꽝응아이성의 미라이 마을. 이 곳에서 베트남 전쟁 기간 중 가장 추악한 전쟁 범죄가 발생했다. 베트남 정부에 따르면 '미라이 학살'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민간인 504명이 미군 손에 사망했다.
미라이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 약 2달 전인 지난 1968년 1월29일. 설날을 하루 앞둔 베트남에 모처럼 구정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호응하듯 당시 남베트남과 대치 중이던 북베트남은 구정 연휴를 맞아 일주일간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구정 휴전'을 선포한다.
하지만 이는 명절 분위기에 취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경계가 느슨해지도록 만들고, 그 틈에 기습 공격을 하려는 북베트남과 베트콩(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기만술이었다.
설 당일인 1968년 1월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등 주요 도시들이 베트콩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사이공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 일부가 점령 당하고 헌병 4명과 해병대원 1명이 교전 중에 전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설날 기습공격'으로 허를 찔린 미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빼앗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한 반격 작전에 돌입한다. 이들이 탈환해야 하는 지역 중엔 베트콩 수중에 들어간 꽝응아이성의 미라이 마을도 있었다.
반격 작전을 기획한 오런 K.핸더슨 대령은 "거기(미라이 마을)가서 남아 있는 베트콩들을 다 쓸어버리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프랭크 A.베이커 중령은 작전 회의에서 23보병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C중대에 '베트콩이나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모두 사살하거나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C중대는 마을에 진입해 샅샅이 뒤졌지만 이들의 본래 목적이었던 베트콩과 그 동조자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미라이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전쟁 수행 능력이 없는 민간인들이었다.
하지만 C중대원들은 미라이 마을 주민 남녀노소 상관없이 모두 끌어내 한 곳으로 집결시킨 뒤 총기를 난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살해했다. 일부 여성 희생자들은 이 과정에서는 집단 성폭행 및 성고문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C중대의 후발대로 출격한 증원부대는 인근에 있는 미케 마을에서도 비슷한 학살을 저질렀다.
작전이 시작된지 4시간이 지난 뒤. 미라이 마을과 미케 마을 등 두개 마을에서 나온 민간인 희생자는 모두 504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미군 측은 사망자는 347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군 측의 철저한 통제로 비밀에 부쳐졌던 미라이 학살 사건은 1년 뒤인 1969년 로널드 해벌 사진기자가 당시 찍은 사진들을 'Life'지에 올리며 세상에 알려졌다. 사진엔 학살을 당하기 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 학살된 주민들의 시체, 흥건한 피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뒤이어 프리랜서 기자 시모시 허시가 당시 미라이 마을에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폭로하면서 이들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즉각 수사에 착수한 미군은 상급부대에서 '마을을 초토화하라', '다 쓸어버려라' 등 명령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상급 부대 장교들은 모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들이 내린 명령이 명확하지 않아 해석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이 사건에 연루된 장교 14명 중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단 1명이었다. 그는 당시 현장을 지휘했던 하급 장교 윌리엄 로우 캘리 주니어 소대장이었다. 그는 민간인 학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만 1971년 가택연금으로 형이 줄었고, 3년 뒤에는 이 마저도 완전히 해제됐다.
미라이 학살 사건이 알려지자 미국엔 반전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 무렵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지하는 '히피 문화'가 태동했다. 존 레논의 Give Peace a Chance, 클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Fortunate Son' 등 노래도 미라이 학살 사건이 알려진 1969년에 발매됐다.
이렇듯 반전 여론이 갈수록 뜨거워지자 부담을 느낀 미군은 결국 1973년 남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후 2년 뒤인 1975년,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의해 적화통일이 되고 만다.
승리를 자신하며 54만 병력을 파병한 미군은 결국 5만명 이상의 전사자를 남긴 채 아무런 소득 없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이 남긴 것이라곤 베트남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 뿐이었다.
PBS와 폴 메들로의 인터뷰 뒷 내용은 오늘날에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와 참전용사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용감한 우리 미군이 미라이 마을에서 힘없는 민간인들을 쏴 죽였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박상혁 기자 rafand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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