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아픈 아이 돌봄)”… 스웨덴서 이 한마디면 모든 게 오케이
지난달 스웨덴 스톡홀름의 한 카페에서 만난 토비아스(37)씨는 “부모님 세대만 해도 육아휴직은 대부분 엄마가 썼지만, 2000년대 초부턴 아빠도 당연히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문화가 굳어졌다”고 했다. 그는 법원 서기로 일한다. 스웨덴 합계 출산율은 1980년대 맞벌이가 늘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부는 ‘여성 독박 육아’를 저출생의 원인으로 봤다. 1995년 엄마든, 아빠든 최소 30일 이상 육아휴직을 쓰도록 의무화한 데 이어 2016년엔 이를 90일로 늘렸다.
부부가 같이 아이를 기르면서 ‘바바(Vabba)’라는 육아 문화가 생겨났다. 바바는 스웨덴어로 ‘돌보다(varda·보다)’와 ‘아이(barn·반)’의 합성어인데, 아픈 아이를 돌본다는 뜻의 신조어다. 아이가 아픈 직원이 “‘바바’ 때문에 출근이 어렵다”는 전화 한 통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간을 낼 수 있다. 육아를 사회 책임으로 보는 문화 덕분이다. 바바는 직원 휴가나 병가에서 차감되지 않는다. 스웨덴 아이들은 추운 2월에 독감이나 설사병 등을 자주 앓는다고 한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2월을 ‘바브르아리(Vabba+February)’라고 부른다. 어린아이들이 아파 회사에 결근하는 부모가 늘어난다는 뜻의 신조어다. 바바 때문이면 회의 중간에 나가는 경우도 문제 삼지 않는다. 못다 한 업무는 재택근무로 처리하거나 다시 출근해 마무리할 수 있다.
스톡홀름 가구 회사 직원인 멀린(28)씨는 이번 달부터 매주 금요일 육아휴직을 쓰기로 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진 남편이 육아휴직을 이용해 한 살 아들을 돌본다. 스웨덴은 아이 1명당 480일의 육아휴직을 주는데 부부가 자유롭게 나눠 쓸 수 있다. 240일씩 나눌 수도 있고 엄마 300일, 아빠 180일도 가능하다. 다만 육아휴직을 쓴다면 남녀 모두 최소 90일은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특히 스웨덴의 육아휴직은 480일을 한 번에 다 쓰는 게 아니라 일 단위나 시간 단위로도 이용할 수 있다. 고용주와 협의하면 오전 근무만 하고 점심 시간에 퇴근해 아이를 돌보는 형태도 가능하다. 멀린씨는 “대다수 회사는 육아휴직으로 빠지는 인원을 고려해 팀 인원을 여유 있게 꾸린다”며 “코로나 이후엔 재택근무와 유연 근무가 보편화돼 ‘화이트칼라’ 직종은 맡은 일만 끝낼 수 있으면 꼭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정부는 지원금으로 육아휴직을 돕는다. 480일 중 390일은 기존 월급의 최대 78%까지 보전해 준다. 나머지 90일에 대해선 하루 180크로나(약 2만3000원)가 나온다. 규모가 큰 회사는 육아휴직 보전금을 10%씩 더 얹어주기도 한다.
스톡홀름 시민들은 “육아 지원책보다 육아 친화적 문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쇠데르훅후셋병원 3년 차 의사 덱스테르씨(36)는 두 살 아들을 돌보려고 작년 9월부터 육아휴직 중이다. 그는 “의사는 내 꿈의 직업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아들과 유대를 쌓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어 “의사 동료들 중에도 스웨덴 출신은 모두 육아휴직을 쓰지만 중동 등 ‘아빠 육아’ 개념이 생소한 지역 출신 의사들은 육아휴직을 잘 쓰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스톡홀름 물가는 만만치 않다. 스톡홀름의 최근 3개월 평균 주택 가격은 8억5500만원으로 올해 1월 서울의 평균 주택 가격(8억1900만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스톡홀름의 출산율은 2022년 기준 1.37명으로, 같은 해 서울(0.59명)보다 2배 이상 높다. 부부가 함께 아이를 기르는 문화가 뿌리내린 것이 저출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 교수는 “남성 육아휴직이 확대된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육아를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굳어졌다”며 “스웨덴도 경제 침체 등으로 출산율이 떨어졌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성별 격차를 좁히는 정책으로 ‘부부 반반 육아’ 문화를 키워 출산율 회복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비정규직 등 취약 계층을 중심으로 복지를 확대한 것도 출산율 반등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또 “지금의 한국의 육아 관련 지원 제도는 ‘결혼한 부부’ 위주로 짜여 있다”며 “‘정상 가족’ 관념에서 벗어나 모든 형태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스톡홀름=윤상진 기자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