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혈관 의사 1330명 “환자 지키겠다”
16개 의대 교수들 사직 결의… “사직서 내도 진료에 최선 다할 것”
전공의(인턴·레지던트)에 이어 의대 교수들의 사직 움직임이 확산하는 가운데 뇌혈관계 의사 1300여 명은 “병원을 지키겠다”는 성명을 15일 냈다.
대한뇌혈관외과학회와 대한뇌혈관내치료의학회는 이날 “의사들의 (의대 증원 반대) 주장이 ‘미래의 국민 건강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지금 당장의 문제는 (의료 공백) 현실”이라며 “조속하고 합리적 해결이 될 때까지 저희는 병원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두 학회는 뇌혈관 치료 전문의 1330명이 소속된 단체다. 뇌경색·뇌출혈 환자 등을 긴급 수술하는 뇌혈관계 의사들은 필수 의료 분야에서도 핵심적 ‘바이털 의사’로 꼽힌다.
이날 전국 의대 교수들 모임인 ‘전국 의대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저녁 7시부터 화상회의를 갖고 집단 사직서 제출에 대해 논의했다. 비대위 관계자는 “20개 대학 중 16개 대학 교수들이 사직서 제출에 찬성했고, 나머지 4개 대학은 내부 설문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어 “16개 의대 교수들은 오는 25일 이후 자율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직서를 제출하더라도 각 대학의 수련 병원 환자 진료에 최선을 다하는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했다. 한 참석자는 “사직서가 수리돼도 봉사 형식으로 하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서울대·경희대·중앙대·경북대·전북대·울산대 의대 교수들은 전공의들이 면허정지 등 불이익을 받는다면 사직 등 집단행동에 나서겠다고 했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오후 서울대 의대에서 유홍림 서울대 총장과 병원장, 의대 비대위원장 등과 만나 의료 파행 문제를 협의했다. 정부 관계자는 “정부와 대학병원, 비대위, 전공의, 의대생들이 모여 현 사태 해결을 위한 소통 창구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이날 ‘사직 도미노’ 분위기에서 뇌혈관계 전문의들의 성명은 ‘환자 우선’ 원칙을 강조한 것이란 평가다. 이들은 “(의대 증원) 정책 자체의 좋고 나쁨, 혹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필수 중증 응급 의료가 전공의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던 대한민국 의료 현실에서 지금의 갑작스러운 전공의 사직에 의한 의료 공백은 국민의 생명권과 직결되는 사태”라며 “정부도 의료계도 한발 물러서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이들은 의료 파행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에 대해선 “죄송합니다. 국민 여러분께는 이 말밖에 할 수 없다”고 했다. 제자인 전공의들에겐 “한창 배우고 공부해야 할 시기에 과거와 어른들의 잘못 때문에 (전공의들의) 미래가 위험해진 것에 스승이자 선배로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밝혔다.
뇌혈관계 전문의들은 “정부가 말하는 필수 의료가 곧 두 학회 구성원이 하고 있는 의료이며, 우리는 지난 시간 잘못된 의료 시스템의 폐해를 그대로 받아왔던 당사자”라며 “그럼에도 우리는 응급실과 중환자실, 수술실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병원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먼저 정부에 대해 “의사 단체들을 범죄 집단화하는 것을 즉시 중단하고 (의사들과) 협의와 합의를 통해 이번 (정부) 정책의 모든 부분을 상의할 수 있음을 인정하라”고 했다. 이어 의료계를 향해 “대한의사협회 및 전공의협의회는 정부가 성실한 자세로 협의를 제안하면 책임감을 갖고 응하며, 협상이 개시되면 휴학 중인 의대생들은 즉시 학업에 복귀하길 바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의 끝에는 국민 건강이라는 대의가 있음을 명심하라”고 밝혔다.
지방의 한 심뇌혈관 분야 교수도 “교수 집단 사직은 국민이 의사들에게 더 등을 돌리게 만들 것”이라며 “환자를 지키면서 정부와 전공의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대한간호협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의료인의 제1 책무는 환자의 생명 보호”라며 “의료인은 환자를 떠나선 안 된다”고 했다.
의료계에선 ‘사직하자’와 ‘병원을 지키자’는 목소리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가 지난 8~14일 회원 3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90%가 ‘전공의 처벌 땐 집단 사표를 결의해야 한다’고 답했다. 비대위 관계자는 “전공의들처럼 응급실까지 모두 비우긴 어려울 것 같다”며 “응급실, 중환자실 등은 지키는 교수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의대 교수들이 집단 사표를 제출해도 수리 전까진 진료·수술을 할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경기도 상급 종합병원의 내과 교수는 “제자(전공의)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교수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라며 “그렇다고 해도 교수들마저 환자를 떠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총장이든 병원장이든 교수들 사표를 수리하진 않을 것”이라며 “사표가 수리될 때까지 일한다고 하면서 교수에 따라 환자를 계속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일부 교수는 환자 진료 건수를 줄이는 방식 등으로 사실상 태업(怠業)할 가능성도 있다. 부산의 한 상급 종합병원 교수는 “정부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수준을 맞추기 위해 의사 수를 늘리겠다고 하니, 우리도 진료 환자 수를 OECD 수준으로 낮춰 적게 진료해야 한다고 말하는 의사가 많다”고 했다. 서울의 대형 병원 관계자도 “이미 상당수 의사가 재진 환자만 진료하고 신규(초진) 환자는 받지 않는 식으로 일을 줄이고 있다”고 했다. 의료계에선 의료 파행이 장기화하면 교수들의 ‘번 아웃(극도의 피로)’도 심해져 정상 진료가 어려워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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