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출퇴근 시달리던 시민에게 워라밸 돌려준 ‘수직 도시’

채민기 기자 2024. 3. 16.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개발자가 본 도쿄의 변신
“개발은 삶의 문제 해결하는 과정”

도쿄를 바꾼 빌딩들

박희윤 지음|북스톤|296쪽|1만9000원

와세다대 박사 과정을 거쳐 일본의 부동산 개발회사 ‘모리 빌딩’ 소속 컨설턴트로 한국에서 일하던 2000년대 초반, 저자는 회사 이름을 건물 이름으로 혼동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사명(社名)이 모리 부동산으로 잘못 보도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빌딩이라는 말에는 ‘사회에 공헌하는 개발’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제목의 ‘빌딩’ 역시 하나의 건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리 빌딩은 롯폰기 힐스, 아자부다이 힐스 같은 도쿄의 대표적 개발 사업을 성공시킨 곳이다. 지금은 한국 부동산 개발사의 임원이 된 저자가 도쿄에 새 활력을 불어넣은 도심 개발 사업의 성공 사례를 소개했다.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

책에 등장하는 도쿄의 명소들은 한국인들에겐 관광지로 이름난 곳들이다. 그러나 이곳의 볼거리와 먹거리보다 여러 프로젝트가 담고자 했던 삶의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기존의 도쿄 안내서와 차별화된다. “개발 프로젝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각각의 도시 모델이 제안하는 새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이다.”

모리 빌딩의 대표작인 ‘힐스’ 시리즈는 ‘직(職), 주(住), 락(樂)이 어우러진 수직 녹원 도시’를 목표로 했다. 소모적인 장거리 출퇴근에 시달리던 도쿄 시민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돌려주고, 사람과 자본이 모여들어 새로운 아이디어와 산업을 창출한다는 창업자 모리 미노루(1934~2012)의 구상을 입증한 실험장이었다. 그 원점은 아크 힐스(1986)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아의 높은 인구밀도에 대응하는 고층 건물에 주거·업무 시설을 넣고 나머지 저층부에 상업 시설과 녹지를 조성해 생활 환경을 개선했다. 이런 접근법을 기본으로 ‘문화 도심’을 표방한 롯폰기 힐스(2003), 도쿄의 글로벌 커뮤니티로 설계된 아자부다이 힐스(2023)까지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다른 회사들이 주도한 사업들도 나온다. 미쓰이 부동산의 니혼바시 재개발은 에도 시대부터 상업 중심지였던 지역의 역사를 콘텐츠로 삼았다. 중심 건물인 ‘코레도 무로마치’엔 230년 된 부엌칼 공방 ‘기야’, 320년 역사의 가쓰오부시 전문점 ‘닌벤’ 같은 노포들이 입점해 있다. 취향이 분명하고 품격을 중시하는 소비 생활을 주제로 설정한 결과다. 1969년 미국식 쇼핑센터를 본떠 개장한 도쿄 교외 후타고타마가와의 다카시야마 쇼핑몰은 최근 아케이드를 식물로 단장하고 요리교실 같은 체험형 매장을 입점시켰다. 물건은 온라인에서 사고 오프라인에서는 머무르고 참여하는 경험을 중시하는 변화를 반영한 전략이다.

◇서울역·용산의 앞날은?

서울의 풍경을 비추는 거울처럼 읽힌다. 가령 도쿄역 복원 사업을 설명하는 대목에선 서울역이 떠오른다. 여러 차례 철거 위기에 몰렸던 도쿄역은 2012년 옛모습대로 복원됐다. 역사 유적의 남는 용적률을 주변으로 이전하는 새 도시계획 제도를 적용한 결과, 예스런 분위기의 서측 마루노우치와 현대적 감각의 동측 야에스 일대를 아우르는 ‘도시의 현관’으로 거듭났다. 저자가 “수도의 중앙역으로서는 다소 아쉽다”고 한 서울역 일대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미쓰이·미쓰비시 같은 재벌들처럼 계열사만으로 오피스 빌딩의 기본 수요를 채우지 못하는 모리 빌딩이 도라노몬 힐스에 유망 기업을 입점시키기 위해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과 손잡고 직접 스타트업을 육성했다는 대목에서는 용산국제업무지구의 앞날을 생각하게 된다. 올해 초 나온 서울시 발표는 ‘융복합 국제업무도시’를 지향한다면서도 그곳에 어떤 기업을 어떻게 유치할지보다 ‘용적률 1700%’ ‘100층 랜드마크’ ‘뉴욕 같은 상징 조형물’ 등 외형에 중점을 둔다. 빠르면 2030년 입주를 목표로 한다는 이곳이 건물부터 짓고 보는 한국식 개발의 고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까.

개발은 곧 파괴이며 고층 빌딩은 삭막할 뿐이라는 편견을 넘어선다. 소개된 사업들은 거의가 고층 빌딩을 활용해 ‘직주 근접’이나 ‘직주락 융합’을 실현한 사례들이다. 이는 일터(공장)와 거주지의 분리가 당연했던 제조업 시대를 지나 지식 정보 사회로 접어드는 도시 공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저(低)밀도 도시의 환상에서 벗어나 직주 근접이라는 방향성을 제시한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메디치)과도 맥이 닿는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