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니 상처가 아물었다
[’아무튼, 봄’ 희망 편지] (10)
봄의 문턱에 서면 가끔 악몽처럼 떠오른다. 내 생애의 아픈 흉터, 1989년 초겨울의 이른바 ‘연탄가스 사건’. 젊은 세대가 들으면 그게 뭔 소리인가 싶겠지만 그때만 해도 겨울이면 왕왕 있던 일이었다. 전말은 이랬다. 어느 날 서울대 교수 회의에서 우리는 왜 모든 역사가 구전과 설화밖에 없느냐, ‘동경예대 백년사’ 같은 책 한 권이 없느냐, 우리도 당당한 대학사(大學史)가 필요하다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그랬는데, 말한 사람이 써보라며 덜컥 이 일이 내게 떨어지고 말았다. 자승자박.
변변한 자료 없이 1985년 시작한 이 일은 1989년이 다 가기까지 지지부진, 끝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나는 대학 앞 고시촌에 방 하나를 얻어 들어갔다. 고시 공부 하듯 달라붙어 그해가 가기 전 끝장을 볼 작정이었다. 문제는 처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훅 끼쳐오던 역한 냄새. 주인은 오래 비워놔 그런 거라 했지만 어깨 너머로 곰팡이 핀 벽지가 보였다.
이틀째 되던 밤에 사달이 났다. 짙은 안개에 갇힌 듯 의식이 몽롱했고 사지는 꿈쩍할 수도 없었다. 어디선가 샌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이다. 옥죄어 오는 죽음의 공포. 앰뷸런스 소리 요란하게 병원으로 옮겨지는데 ‘내게도 이런 일이’ 싶었다. 이후 양팔에 주삿바늘 줄레줄레 꽂고 수술실과 회복실을 오가며 무채색 겨울을 보내게 됐다. 아니 처음 가스에 중독되던 날부터 무채색에 갇힌 느낌이었다.
30대의 육신은 남루하게 구겨졌고 점점 몰골은 참담해졌다. 몇 번 험한 수술이 끝나고 시작한 건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플라시도 도밍고 이름 외우기. 일부 달아났을지 모를 기억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자주 나는 ‘파바로티 도밍고’나 ‘루치아노 플라시도’ 사이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가끔은 난데없이 ‘플라시도 조용필’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운전하다 본 앞차 번호가 잠자리에 누우면 줄줄 떠올라 귀찮을 정도였던 기억 천재가 ‘기억 바보’가 되는 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봄 풍경으로 바뀐 벽걸이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병실에 누워 이탈리아 남자 이름 따위나 떠올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 가자. 이 무채색 방이 아닌 어머니 뜰로 가자. 거기에 지금쯤 온갖 꽃이 앞다퉈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생명의 환희 가득한 그 색계(色界)로 가자.
고향집 대문을 밀고 들어서니 어머니는 변함없이 낡은 앉은뱅이 탁자 위로 그보다 더 낡은 성경책을 펴 들고 앉아 있었다. 한쪽엔 평생 들, 들, 들, 돌아가던 낡은 재봉틀. 그 두 가지 정물은 어머니의 인생 도구이기도 했다. 나는 햇살 퍼지는 툇마루에 앉았다. 비로소 살 것 같았다. “요새도 재봉틀 돌리세요?” “못 한다, 눈이 어두워져서.” 나는 연탄가스며 입원 사실을 일절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않고 있었다.
대학 시절 미국 유학을 가겠다고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저 재봉틀을 돌리다가 돋보기 너머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물었지. “그림을 배우러 간다고? 미국으로?” 그 단 두 마디에 유학길을 포기했던 기억. 정원은 어머니가 가꾼 꽃으로 가득했다. 목청껏 우는 수탉 소리가 작은 집을 울렸다. 달콤한 봄바람은 코를 간지럽히고 스멀스멀 새로운 기운이 퍼져나갔다. 꽃들이 토해내는 형형색색이 내 혈관을 타고 달렸다.
바야흐로 어머니의 정원은 꽃들의 전쟁터였다. 그립던 흙내음, 타오르는 햇빛, 그 햇빛에 녹아흐르는 색, 색, 색…. 색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구나 싶었다. 상처가 아물어갔고, 그렇게 새봄이 열리고 있었다. 올 테면 와라. 연탄가스고 뭐고, 올 테면 와라. 나는 여기 어머니 생명의 정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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