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스타 무용가의 親日 이력, 김일성은 개의치 않았다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2024. 3. 1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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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이념에 휘둘린 예술인 최승희의 월북과 숙청
일러스트=한상엽

한국 최초의 ‘월드 스타’ 최승희는 일본군 위문 공연차 들른 중국 상하이에서 해방을 맞았다. 최승희는 전쟁 막바지 ‘황군 위문’을 구실로 자택이 있던 도쿄를 떠나 조선, 몽골을 거쳐 1945년 봄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주가 끝난 후 남편 안막은 독립 동맹에 참여하기 위해 옌안으로 떠났다.

안막은 와세다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주의 문예 운동에 뛰어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이론가였다. 본명은 안필승이었지만, 결혼 후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石井漠·석정막)의 이름을 따 ‘안막’이라는 필명을 썼다. 졸업 후 일본 최대 출판사 ‘개조’에 입사하지만, “최승희가 춤을 그만두든지, 자네가 회사를 그만두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최승희의 팬이었던 사장의 권유에 따라 사직하고 아내의 매니저 역할에 전념했다.

1911년생인 최승희는 무용가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16세에 처음 무용을 접했다. 1926년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에 합격했지만, 연령 미달로 입학이 이듬해로 미뤄졌다. 때마침 경성공회당에서 이시이 바쿠가 신(新)무용을 공연하면서, 경성일보에 ‘연구생’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를 본 큰오빠 최승일이 막냇동생 최승희에게 그의 문하에 들어가라고 권유했다. 니혼대학 미학과를 졸업한 최승일은 KAPF 결성에 참여했고, 경성방송국(JODK) 프로듀서, 영화 제작자로도 활약했다. 인기 영화배우 석금성과 결혼해 네 자녀를 두었다. 최승희에게 안막을 소개해 준 사람이 최승일이었다.

최승희의 천재성은 무용을 배운 직후부터 드러났지만, 독창적인 레퍼토리를 찾지 못해 몇 해 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런 최승희에게 이시이 바쿠는 조선 춤을 배워보라고 권했다. 서양 춤과 조선 춤을 접목한 ‘에헤라 노아라’ ‘검무’ ‘승무’ 등으로 최승희는 ‘일본 최고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았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최승희의 열렬한 팬이자 후원자였다.

1936년쯤 최승희는 무용가를 넘어 ‘스타 연예인’ 반열에 올랐다. 일본 여성지에 26세밖에 안 된 그의 자서전과 자전소설이 연재되었고, 그를 모델로 한 일본 영화 ‘반도의 무희’(1936)에서 주연을 맡았다. 마쓰자카야백화점, 아지노모토, 메이지초콜릿, 콜롬비아 축음기, 화장품, 안약, 비타민, 은단, 치약 등 수많은 제품의 광고 모델로 발탁되었다. 가수로 데뷔해 ‘향수의 무희’ ‘이태리의 정원’ 등 음반도 취입했다. 일본의 A급 무용가 출연료가 500엔 정도였을 때, 최승희의 출연료는 그 10배인 5000엔에 달했다. 당시 경성 시내 중산층 주택 가격이 1만엔 남짓이었다. 이렇듯 막대한 수입으로 최승희는 도쿄에서 가장 값비싼 주거지역이었던 에이후쿠초(永福町)에 500평 규모의 연습실을 겸한 2층 저택을 신축했다.

1934년 일본의 한 바닷가에서 촬영된 최승희의 춤 사진. 최승희는 당대 대표적 '단발미인'이기도 했다. /광주시립미술관

1938년부터 3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뉴욕, 파리, 브뤼셀, 제네바, 밀라노, 피렌체, 로마, 암스테르담, 리우데자네이루, 몬테비데오,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미국, 유럽, 중남미 주요 도시에서 150여 차례 공연했다. 공연장에는 시장, 의원, 대통령 부인 등 유력 인사는 물론 영화배우 로버트 테일러, 게리 쿠퍼, 찰리 채플린, 소설가 존 스타인벡, 지휘자 스토코프스키·토스카니니, 화가 피카소 등 유명 예술가가 줄을 이었다.

3년 동안의 월드 투어에서 최승희는 공연 레퍼토리의 절반 이상을 조선 춤에 할애했고, 공연 팸플릿에는 ‘일본 무희’가 아니라 ‘한국 무희(Korean Dancer)’라고 표시했다. 하지만 ‘사이 쇼키(Sai Shoki)’라는 일본식 한자음으로 이름을 쓰고, 조선인 교포의 면담은 거부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우호 행사에만 참여한다는 이유에서 ‘일본 정부의 앞잡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뉴욕 공연 때는 극장 앞에서 교포들이 최승희 배격 전단을 뿌리며 확성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기간 모든 무용 공연은 군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군부대 위문 공연 외에는 대체로 허가되지 않았다. 하지만 월드 스타 최승희의 공연은 군부대 위문 공연뿐만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한 공연도 모두 허가되었다. 티켓 판매 수익 중 상당 부분을 ‘국방 헌금’으로 헌납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는 공연을 마치면 수천에서 수만 원씩 국방 헌금을 헌납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최승희가 조선, 일본, 만주, 중국, 몽골 등에서 개최한 ‘군부대 위문 공연’ ‘헌금 모금 공연’은 수백 회에 달했고, 대부분 만석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친일 행위를 목격한 사람이 아시아 전역에 차고 넘쳤다.

상하이에서 해방을 맞은 최승희는 간신히 차표를 구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옌안에 있던 안막이 사람을 보내 “동지들과 함께 평양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전했다. 1946년 2월 최승희는 ‘일본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장제스 군대에 체포되었다. 다행히 베이징 지역 사령관이 최승희의 팬인 인연으로 얼마 안 가 풀려났다. 최승희는 서울로 귀국을 서둘렀다. 베이징에서 함께 지내던 최승일이 물었다. “네가 서울로 가면 남편과 이산가족이 되는데?” “하지만 전 평양으론 안 가요.” “왜?” “예술을 시골에서 할 수는 없잖아요.”

조선이 낳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수림문화재단

최승희는 ‘코리안 발레’를 창작하고 후계자를 길러 해방 조국의 문화 융성에 기여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귀국 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를 맞는 기자와 군중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안막은 평양으로 갔는데 왜 서울로 왔느냐?” “언제 이북에 갈 것이냐?” “친일 행위는 어떻게 사죄할 것이냐?” 예상치 못한 남한 동포의 냉대에 당황하며 한 달을 보냈을 때, 안막이 서울 집으로 찾아와 월북을 종용했다. ‘시골’에서는 못 산다고 완강히 버티는 최승희에게 안막이 말했다. “여기 있다간 당신은 서대문형무소에 갈 일밖엔 없지만 북에서는 개선장군처럼 맞아줄 것이오.”

최승희는 귀국 한 달 만에 안막과 함께 김일성이 보낸 발동선을 타고 월북했다. 안막의 말대로 김일성은 최승희를 특별히 예우했다. 평양 시내를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가지라고 했고, 최승희는 지금의 옥류관 자리에 있던 대동강변에서 제일 큰 3층 한옥을 골라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렸다. 최승희의 친일 행위는 “일본놈들한테 끌려다닌 건데 어카겠어? 신경 쓰지 말고 무용 창작 사업이나 잘하라”며 즉석에서 ‘사면’했다. 소련산 최고급 포베다 승용차를 선물로 주었고, 6‧25전쟁 때는 베이징으로 보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무용가동맹위원장, 공훈배우, 노력훈장, 인민배우 등 ‘공화국’이 줄 수 있는 모든 명예를 부여했다.

1958년 안막이 숙청되면서 최승희는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김일성은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친일 이력’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반역은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참고 문헌>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 최승희론’, 최승희 자서전, 이문당, 1938

강준식, ‘최승희 평전’, 눈빛, 2012

김찬정, ‘춤꾼 최승희’, 한국방송출판, 2003

오세준, ‘최승희 월북 요인과 남편 안막의 영향’, 한국무용교육학회지 제26-2집, 2015

정병호, ‘춤추는 최승희’, 뿌리깊은나무,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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