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역사가 흘러온 안국동 8-1번지, 나는 집이다[박종인 기자의 ‘흔적’]
서울 안국동 윤보선 가옥 100년사
서울 종로구 안국동 8-1번지에 큰 집이 있다. 집 이름은 ‘윤보선 가옥’이다. 도로명 주소는 ‘윤보선길62′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살던 집이다. 지금은 아들 윤상구가 살고 있다. 국가 사적이다.
구한말에서 식민지, 전쟁과 전란 후 격랑 속에서도 집은 자리를 지켰다. 집을 지었던 사람은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여흥 민씨 권력자 민영주였다. 이후 집은 갑신정변 주역 박영효를 거쳐 일본인, 그리고 한 나라 대통령과 그 가족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하나같이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끌고 간 주역들이다. 규모와 외형 또한 거듭 바뀌었지만 그 역사가 집에 박아놓은 흔적은 변함이 없다. 그 집이, 100년 자기 역사를 말한다.
내가 태어났다
1870년 어느 날 내가 태어났다. 나는 집이다. 나를 잉태한 존재는 역사고 나를 만든 이는 여흥 민씨 권력자 민영주다. 민영주는 장터를 떠돌며 떡과 된장을 파는 장돌뱅이였다.(황현, 국역 ‘매천야록’1 上 14.장탕반과 망나니 민영주, 국사편찬위) 그런데 1866년 음력 3월 21일 골목 하나 아래 감고당에 살던 친척 민씨 여자가 시집가면서 팔자가 피었다. 그녀가 명성황후로 추존된 왕비 민씨, 민비다.(1866년 3월 21일 ‘고종실록’) 민비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또한 장인이 여흥 민씨 민치구이고 민영주 할아버지 민치우는 이 민치구의 동생이다. 이 겹사돈 관계 덕에 나를 만든 민영주는 왕비 쪽으로도 친척 조카뻘이요 대원군 쪽으로도 처조카뻘인 막강 권력자가 되었다. 권력을 가진 망나니.
그 덕에 안국동 언덕 아래에 내가 태어났다. 100칸이 넘는 대저택이다. 민망나니 영주가 긁어모은 돈이 대궐 같은 집으로 변했다.
나는 화려하였다
봄이면 꽃이 만발하였다. 언덕 북쪽까지 펼쳐진 내 동산 꽃나무 사이로 정자들이 들어섰다.
내가 얼마나 컸느냐. 375칸이었다. 99칸 상한을 넘어도 한참 넘는다. 첫 주인 민영주에게 고종이 묻는다. “궁궐을 짓는다며?” “대궐이 아니라 절이올시다.” 고종은 웃고 만다. 민망나니가 가진 다른 별명이 ‘민부처’였으니까. 망나니처럼 잔인하게 모은 재물로 부처처럼 행복히 산다고 하여 또 다른 별명이 부처였으니, 웃은 것이다.(황현, ‘매천야록’3 1899 10.성균관에 박사제 설치)
훗날 나를 차지했던 일본인 쓰네야 모리후쿠는 나를 ‘주변에서 가장 깊숙하고 한적하고 아름다운 정자가 많아 겨울만 빼면 책 읽기 좋은 집’이라고 했다.(쓰네야 모리후쿠(恒屋盛服), ‘朝鮮開化史’ 서문, 東亞同文會, 1904) 또 어느 날 윤치호가 나에게 왔다. 민영주가 기둥에 걸어놓은 주련을 보고 한참 웃었다. 망나니 민영주가 ‘독성현서 행인의사(讀聖賢書 行仁義事: 성현이 쓴 책을 읽고 인의로운 행동을 실천하라)’고 적어놓은 게 아닌가.(1920년 11월 5일 ‘윤치호일기’)
갑신정변, 사라질 뻔했던 나
내가 있던 북촌에는 민씨들 집이 많았다. 1882년 6월 군인들의 반란 ‘임오군란’ 때 많은 집이 불탔다. 1년 넘게 군인 월급을 주지 않은 선혜청 당상이 민씨였고, 군인들은 ‘진살제민(盡殺諸閔: 민씨들을 다 죽인다)’이라며 집들을 불태웠다. 그리고 1884년 옆집 살던 홍영식과 언덕 위에 살던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은 대실패로 끝났다. 옆집 주인 홍영식은 거리에서 죽었고 집은 병원으로, 여고로 변했다. 나와 맞붙어 있던 김옥균 집은 학교로 변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으로 달아났다. 모두 집이 북촌이었다. 내 주인 민영주는 이후에도 매일 밤 고종과 민비가 벌이는 심야 파티에서 노래자랑대회를 주관하며 권력을 누렸다.(황현, ‘매천야록’2, 1894 1 19. 궁중의 아리랑타령) 나는 건재했다.
내가 궁궐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심야파티를 벌이는 국왕 부부에게 가난한 백성이 죽창을 들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다. 진압을 핑계로 일본군이 들어왔다. 일본 지원을 받은 개혁 갑오정부가 들어섰다. 민씨들은 몰락했다. 잠깐 몰락했다.
고종과 왕비 민씨는 일본으로 갔던 박영효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주었다. 국왕 부부는 옛 주인 민씨를 버리고 박씨를 택했다. 민비는 박영효에게 관복 제작용 옷감과 직녀공을 보내고 저택을 하사했는데(‘주한일본공사관기록’5-五-(14)조선 정황 보고 제2, 1894년 12월 28일) 그 저택이 바로 나였다. 박영효는 함께 망명했던 서광범과 함께 새로운 내 주인이 되었다. 갑오정부 간섭을 옛 정적과 손잡고 물리치려는 계책이었다. 사람들은 화려한 나를 일러 ‘임금이 사는 집과 반대’라고 수군거렸다.(황현, 앞 책 2권, 1895년 ① 8.박영효의 기복) 나는 이후 박영효 군호를 따 금릉위궁이라고 불렸다.
내가 불탔다
국왕 부부 계책은 실책이었다. 금릉위 박영효 또한 궁궐로 변한 내 사랑채에서 다시 반역을 꿈꿨다. 고종 부부에게는 배신이었고 박영효에게는 두 번째 정변이었다. 불과 6개월 만에 박영효는 가족을 남기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박영효 측근과 내각 고문이던 쓰네야 모리후쿠가 내 새 주인이 되었다.
그러던 1899년 6월 13일 저녁 폭탄이 폭발했다. 박영효 일파가 만들던 폭탄이 터져버렸다. 임오군란 방화를 견뎌낸 내가 불탔다. 폭탄을 만들던 두 사람이 죽었다. 세상이 흉흉하여 곳곳에서 사람들이 관리들 집에 폭탄을 던지던 때였다. 겁에 질린 고종도 경운궁(덕수궁)에서 미국-영국 공사관 틈에 있는 중명전으로 피할 정도였다.
경찰이 들이닥쳤다. 함께 살던 주인집 가족이 모두 끌려갔다. 하지만 주인 박영효가 일본에 있으니 결론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대신 나는 크게 부서졌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3-8-(46) 망명자 귀국 운운에 관한 풍설과 폭렬탄 1건, 1899년 6월 27일) 나를 나눠 함께 살던 박영효 친구 쓰네야는 겁에 질려 귀국했다. 나는 대한제국 황실로 넘어갔다.
나를 스쳐간 사람들
1902년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제국 농상공부 고문 가토 마스오에게 나를 주었다. 가토는 나를 철도국 사무실 겸용으로 삼았다.(1902년 11월 22일 ‘황성신문’ 등) 가토는 고종이 준 현금 2000원(현시세 200만달러)으로 파괴됐던 나를 완벽하게 부활시켰다. 1907년 귀국했던 옛 주인 박영효가 잠시 머문 뒤 나는 사업가 김용달에게 팔렸다. 김용달은 경성직뉴라는 섬유회사 주주였다. 김용달은 나에게 엄청난 돈을 퍼부어 새집으로 만들었지만 본인은 파산하고 말았다. 경성직뉴는 같은 주주였던 김성수라는 사람이 인수해 경성방직으로 흡수됐다. 김성수는 훗날 동아일보를 차렸다.
은행으로 넘어간 나를 살린 사람은 조선 귀족 조동윤이다. 남작 조동윤은 이 화려하고 넓은 나를 자기 첩에게 주었다. 젊고 예뻤던 그 여주인에게 무당이 말했다. “집이 불길하다.” 그녀는 며칠만에 달아나 버렸다.(1918년 6월 3일 ‘윤치호일기’) 나를 잡은 사람은 모두 망하거나 불우했다.
1918년, 버려진 나를 되살린 사람이 윤치소다. 개화파 기업가다. “나라 판 일 회개하라”며 내가 있는 땅 북쪽 언덕에 살던 조선 귀족 박제순으로부터 기부받은 돈으로 교회를 신축하고, 그 옆에 있는 나를 윤치소가 샀다. 교회 이름은 안동교회다. 교회는 지금도 내 옆에 있다. 그 사이 첫 주인 민영주는 왕실 땅을 가로채려다 걸리고 이토 히로부미 동상을 세우자고 설치다 일본인으로부터까지 욕을 먹었다.(황현, 앞책 6권, 1909년 ④ 1.안중근의 이등박문 사살) 집은 고쳐도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
전쟁이 터졌다. 부산으로 피란 간 집주인 대신 인민군과 유엔군이 나를 교대로 병원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나는 양쪽 공격을 무사히 넘겼다. 내가 지금까지 온전하게 버틴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인민군이 징발했던 이웃집 큰 거울이 지금도 나에게 있다.
대통령이 살았다
윤치소 사촌형 윤치호는 “크기만 할 뿐 품격이 없다”며 나를 싫어했다. 하지만 이후 나의 주인은 지금까지 윤치소와 그 아들 그 손자 가족이다. 윤치소 아들 이름은 윤보선이다. 대한민국 전 대통령이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을 나오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윤보선은 나를 획기적으로 변신시켰다. 옛 조선식 큰 상을 테이블로 만들어 온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남녀불문 노소불문이었다.
박영효가 또 다시 반란을 꿈꿨던 사랑채는 야당 회의실로 변했다. 아침이면 정치인들이 나에게 와서 사랑채 안방 방석에 앉았다. 방석은 서열이다. 자기 앉을 방석 위치 하나 옮기는 데 5년이 걸린다고 했다. 젊은 정치가 김영삼은 응접실에 대기하다가 회의 결과를 기자들에게 발표하곤 했다.
주인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나를 떠났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그가 돌아왔다. 그는 자기를 ‘정원사’라고 불렀다.
골목 건너편 100년 된 출판사 명문당에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옥탑을 지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내려다봤다. 출판사 사장 어머니가 내 주인과 주인 아들에게 “우리 때문에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한 건 나였고, 내 주인들인데.
어느 날 주인 윤보선이 사랑채 앞에 전나무를 심었다. 어느덧 나무는 옥탑과 사랑채 회의실 사이를 가려버렸다. 전나무는 죽고, 지금은 우람한 향나무들이 거기 산다. 야당 지도자가 사는 집이다. 민주화 바람에 흩날리던 많은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내 주인 윤보선과 그 아내 공덕귀에게 “내 아들, 내 남편 찾아달라”며 울었다. 부부가 어렵게 아들 행방을 찾아주면 그녀들이 내 마당 연못가에서 너울너울 춤을 췄다. 주인집 아들 윤상구가 말했다. “저들이 아들과 남편을 자랑스러워하는구나.” 1980년 그 서울의 봄날, 윤보선은 사랑채에 김영삼과 김대중을 불러 통합을 주문했다. 정치적으로 그가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다. 지금은 주인이 된 그 아들이 나에게 박혀 있는 흔적들을 매만지며 산다.
그랬다. 내가 태어난 1870년부터 1970년대까지 내 안에서 100년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다. 그 사랑채, 그 연못, 늙어가는 그 향나무 그리고 나. 그렇게 내 안에 역사가 고였다. 마을 어귀를 지키는 노거수처럼, 내가 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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