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있는 동료와 ‘일’보다 ‘인생’ 이야기
[오지윤의 리빙뽀인뜨] 꿈
꿈이 있는 한 청춘이라 하던가. 이 트로트 가사 같은 말은 자칫 입에 발린 소리처럼 들리지만 지독한 진실이다. 나보다 한참 선배인 동료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가 나의 또래처럼 친근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으니까.
J는 꿈이 있는 동료였다. ‘마흔 살 안에 팀장이 되겠다’ 같은 꿈은 아니었다. 그녀의 꿈은 ‘그림 동화 작가’가 되는 거였다. J는 가끔 내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내줬다. 회사에서도 일을 똑 부러지게 하는 그녀는 밤마다 그림을 그렸다. 그러더니, 진짜로 그림이 실린 책을 내기도 했다.
꿈이 있는 동료와의 대화는 흥미롭다. 그들은 ‘일’보다 ‘인생’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이 ‘전부’가 아니라, ‘부분’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꿈이 있는 사람의 가장 좋은 점은 ‘자신이 여전히 어떤 분야에서만큼은 미흡한 존재’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만한 사람이 아닐 확률이 높다.
정말 싫어하던 임원과 술자리를 가졌다. 정말 싫어하던 사람인데 조금 덜 싫어하게 되었다. 그가 은퇴 후 어떻게 살지 꿈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가 자녀와 더 친해지고 싶어서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마땅히, 서로의 결함을 나누며 더 가까워지도록 설계되었다고 믿는다. 일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꿈이 있고 고민이 있는 임원 동료가 잠시나마 나와 비슷한 친구로 느껴졌다. 나는 그의 등을 치며, “다 잘될 거야 인마!”라고 말할 뻔했다.
어떤 동료는 주말마다 자녀들과 독서 모임을 한다고 했다. 책임감 있고 다정한 동료 같았다. 나보다 스무 살 많은 선배였는데, 자꾸 더 궁금해졌다. 그가 동네 배드민턴 대회에 참여한 이야기, 아이들에 대한 교육관.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은 너무 길어지거나 지루해지기 전에 나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왔다. TMI(쓸데없이 많은 정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넘어서, 우리는 그렇게 소소한 꿈과 일상을 나누었다.
우리가 흔히 꼰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주로 ‘라떼의’ 옛날이야기를 한다. 과거의 영광으로 후배들을 사로잡고자 할 때, 우리는 ‘꼰대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를 사는 동료의 이야기는 재미있을 확률이 높다. 그 동료가 나보다 스무 살 많은 선배일지라도. 아, 물론, 너무 오랫동안 말하지는 않는 선에서.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