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유명한 화가가 그렸네? 누가 그렸는지 몰랐던 교과서 그림 '민족기록화' 지금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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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민족기록화의 행방
지난 10일 종영한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의 클라이맥스는 강감찬이 이끄는 귀주대첩 장면이었다. 컴퓨터그래픽(CG) 등 여러 첨단기술을 동원한 장대한 전투 신이 호평을 받았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는 한국사의 주요 전투를 이렇게 발달한 기술로 제작된 드라마·영화 장면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윗세대는 주로 교과서·참고서에 나오는 그림 ‘민족기록화’로 기억한다. 한국인 중에 책에서 민족기록화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민족기록화가 언제 그려졌는지, 누가 그렸는지, 실물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 또한 거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 옆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을 다룬 ‘조헌 의병장의 금산 전투’가 걸려 있다. 격렬한 전투 장면을 사실주의 화풍으로 역동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그런데 작가는 정창섭(1927~2011). 그 역시 단색화 운동의 주요 화가로서, 한지의 물성을 살린 고요한 추상화로 유명하다.
어쩌다가 한국 20세기 주요 화가들이 자신들의 화풍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또 이 흥미로운 사실이 지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을까?
작가·연대조차 모르고 소재 불분명 많아
“1967년 4월 민주공화당 의장이던 JP는 생소한 장르인 민족기록화를 그려보자고 화단에 제안했다. 그때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1000호(5.3×2.9m), 500호(3.3×2.5m) 크기의 초대형 캔버스에 한민족 주요 역사의 장면을 그려 넣자는 기획이었다. 작품의 스케일과 참여 작가의 규모가 당대 최초·최대였다. 박광진 서울교대 교수 등 중진·원로작가 55명이 제작에 참여했다. 그때 한국의 화단은 그런 대형 작품을 제작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유화물감도 캔버스를 마련하는 것도 어려웠다. (…) 박 교수는 ‘JP가 일본에 사람을 보내 3t 트럭 분량의 미술재료를 사서 배로 싣고 와 화단에 무료로 풀어놨다. 당시 우리 화가들로는 평생 처음 보는 엄청난 것들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교수는 또한 JP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성에서 본 전쟁 영웅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고 거의 즉흥적으로 민족기록화 사업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JP가 본 그림은 서구에서 ‘역사화(history painting)’라고 불린다. 역사화는 서구 문명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와 역사, 기독교 성경의 장면을 나타낸 그림으로서, 나중에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1830)처럼 동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까지 다루게 되었다. 과거 서구의 아카데미에서는 역사화를 초상화·풍경화·정물화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겼다. 화가가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데다 거대한 화폭에 인물 군상이 자연스럽게 얽혀 있는 모습을 그리는 데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20세기 들어 모던아트의 시대가 열리고 관변적·국가기념비적 예술을 경멸하는 시각이 퍼지면서 고전적 역사화는 사라지게 되었다.
미술사학자 정영목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7년 논문에서 “겉으로는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한 교육적 차원”이었으나 “그 내면에는 군사적인 행동이라는 물리적인 힘을 빌어 탈취한 정권의 비정통성을, 구국이나 호국의 대의 때문에 군사적인 행동이 어쩔 수 없었다는 (…) 역사를 빌어 합리화시키려 하는 정치심리”로 민족기록화가 탄생했다고 비판했다.
“문공부가 제작한 두번째의 민족기록화 구국위업편이 완성돼 전시 중이다. (…) 이종상·오승윤·손수광·박서보씨 등이 각각 ‘태종무열왕’ ‘동학 구주 전봉준’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 순국’ ‘사명당’ 등 20점을 제작했다. 민족기록화가 제작되면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고증과 사보에 대한 예술적 승화의 문제. 이번에도 각 작품들은 ‘작가의 이름을 가리면 누구의 작품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평론가 이경성 씨 말) 개성을 찾기 힘들었다.”
이러한 비판 속에 민주화 이후 민족기록화는 그 존재가 희미해져 교과서나 역사책에 작가 이름은 언급되지 않은 채 일종의 삽화로만 등장해오고 있을 뿐이다. 그와 함께 그 실물들 중 다수는 “소재가 불분명하고 관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미술복원전문가 박유진·이준호의 2019년 논문)
그나마 2000년대 이후 미술을 ‘순수주의’에서 벗어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보는 연구가 늘어나면서 민족기록화가 조금씩 연구되고 있다. 또한 2016~17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민족기록화 중 1973~79년 문예진흥원의 공식 지원을 받아 제작된 106점의 이미지와 작가·재료·소장처 등의 정보를 정리해서 가상미술관으로 공개해 오고 있다. 이중 12점은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등에 있고 소재 불명인 작품도 다수이다.
박 교수는 또 덧붙였다. “‘민족’이라는 말은 시비 걸기 힘든 말이고 그래서 언제나 정책에서 효과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민족을 위한 프로젝트라는 것에 끌린 아티스트들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시간적 거리를 두고 보기 때문에 냉정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당대의 참여 작가들이 민족기록화의 (정권 정당화) 맥락을 모두 이해했는지 알 수 없다. 그걸 잘 알고 적극적으로 동조한 이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부분적으로 이해했더라도 또한 민족을 위한 것으로 자기 스스로를 합리화했을 것이다. 각자의 상황을 개별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박 교수는 또한 민족기록화를 예술작품으로 볼 수도 없다는 견해에 반대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들은 잘 보존해야 하며, 또 엄연히 미술작품이므로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곳에서 소장하면서 다양한 담론을 펼쳐야 한다.”
김 교수는 말한다. “민족기록화는 각 그림이 과거의 역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했느냐의 관점뿐만 아니라 기록화가 제작된 시절에 우리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민족기록화가 어떻게 드러내는가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즉 민족기록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역사라는 것이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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