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생존자들…회복을 위한 정의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김정아 옮김
북하우스
정신과 의사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저자는 미국에서 1990년대 초 출간한 전작 『트라우마』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진실과 회복』은 이후 30년 세월과 함께 어느덧 80대에 접어든 그의 신작. 앞서 트라우마의 회복 과정을 현재의 안전 확보 등 크게 세 단계로 구분했던 그는 이제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로 정의(正義)를 주목한다. 이는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을 개인의 심리적 문제만 아니라 사회정의의 문제로 여겨온 그의 오랜 시각과 맞물린다. 특히 성폭력·가정폭력에 초점 맞춰 그 생존자들, 관련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책 곳곳에 녹여냈다.
저자가 이른바 ‘생존자 정의’의 제1원칙으로 꼽는 것은 ‘인정’.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생존자의 진실과 윤리적 정당성 등에 대한 공동체의 인정을 가리킨다. 성폭력 피해를 ‘자업자득’으로 치부하거나, 가해자를 위한 탄원이 피해자를 고립시키거나 가해자-피해자의 처지를 뒤바꿔놓는 등의 사례는 이런 인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드러낸다. 이어 차례로 다루는 ‘사죄’, ‘책임지기’, ‘배상’ 등도 마찬가지. 예컨대 진정한 사죄는 피해자의 회복에 큰 도움이 되지만, 저자는 이런 사죄가 매우 드물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히려 거짓 사죄로 모욕을 주거나, 사죄했으니 용서하라는 압력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런 압력이 피해자를 억울하게 만들 뿐이며, 성실하고 철저한 사죄라도 결코 피해자에게 용서를 기대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이를 비롯해 읽고 있노라면 트라우마에 대해, 성폭력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벌어진 각종 논쟁과 논의가 고루 떠오르는 책이다. 나아가 대학가 성폭력 등에서 사법적 처벌이 아닌 방식으로 생존자의 회복을 도모하는 방안, 성매매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양극단 시각 등도 다뤄진다. 저자는 생존자들 인터뷰를 토대로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가해자의 처벌보다도 생존자 자신의 회복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앞서 사법제도의 문제도 지적한다. 책은 ‘예방’과 성범죄자의 ‘재활’에도 각각의 장을 할애했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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