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안주는 디너 파티...'변두리 공공극장'의 도발

유주현 2024. 3. 1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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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강동아트센터서 아시아 초연 ‘푸드’
식사를 엔터테인먼트 쇼로 승화시킨 ‘이머시브 다이닝’이 뜨고 있다. 음식을 먹는 행위에 엔터테인먼트를 가미해 퍼포먼스화한 새로운 형태의 미식 체험이다. 공연장인지 레스토랑인지 모를 공간에서 쇼에 참여하며 식사를 하다 보면 내가 관객인지 식객인지 헷갈린다.

21세기 음식문화는 거대한 산업의 일부가 됐고,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지 선택의 폭도 방대해졌다. 더 이상 음식이란 배를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다. 자신을 표현하거나, 돈벌이가 되는 콘텐트를 찍기 위한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머시브 다이닝’ 같은 쇼가 등장한 이유다.

그런가 하면 멀쩡한 디너 테이블에 초대해 놓고 밥을 안 주는 ‘이머시브 퍼포먼스’도 있다. 4월 4~7일 강동아트센터에서 아시아 초연으로 공연되는 제프 소벨(Geoff Sobelle)의 원맨쇼 아닌 원맨쇼 ‘푸드’다. 2022년 미국 필라델피아 초연 당시 듣도 보도 못한 독특한 형식으로 화제를 모았고, 지난해 8월 공연계 최고 권위의 영국 에딘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총 27회 공연이 가장 빨리 전석 매진되며 흥행성도 입증했다. 이후 뉴욕 BAM(Brooklyn Academy of Music)을 거쳐 미국 투어와 호주 퍼스 페스티벌을 막 마치고 오는 핫한 무대다.

에딘버러 페스티벌서 가장 빨리 매진

지난해 에딘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서 가장 핫했던 공연 ‘푸드’. 관객이 무대에 올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머시브 퍼포먼스’다. [사진 강동문화재단]
제프 소벨은 찰리 채플린을 추종하는 피지컬 씨어터 아티스트이자 마술사로, 슬랩스틱 코미디와 마술, 설치미술로 ‘무대를 춤추게’ 하면서 철학적 메시지를 던지는 유니크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푸드’는 그의 일상 시리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데, 이 시리즈는 에딘버러 프린지 퍼스트 상, 에딘버러 어워즈 최우수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특정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확장하며 일상적인 소재를 비일상적으로 탐험하는 게 시리즈의 특징이다. 첫 작품 ‘디 오브젝트 레슨(2013)’은 수백 개의 종이박스로 가득한 무대에 온갖 오래된 물건들을 쌓아놓고 ‘가치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했고, 국내서도 공연됐던 ‘홈’(2017)은 집에 얽힌 사람들의 사소한 추억부터 주택 부족과 이주 문제까지 아울렀다.

시리즈 피날레인 ‘푸드’도 음식에 얽힌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에서 시작해 세계화의 비용과 과소비, 식량부족 문제와 인류의 진화에 대한 명상까지 확장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공연을 보는데 필요한 시각과 청각 외에 후각과 미각, 촉각까지 오감을 다 사용하는 공감각적 퍼포먼스다.

지난해 에딘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서 가장 핫했던 공연 ‘푸드’. 관객이 무대에 올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머시브 퍼포먼스’다. [사진 강동문화재단]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무대가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 컨셉트의 디너 파티 현장으로 변신한다. 천장에 거창한 플라스틱 샹들리에가 매달리고, 새하얀 테이블보가 덮힌 5.5m×5.5m의 대형 식탁 위에 디너 플레이트와 은식기가 세팅된다. 딱 30명의 관객만 앉을 수 있는 테이블석의 경우 총 5회차 공연이 20분 만에 매진됐다.

웨이터 복장을 한 소벨이 관객에게 말을 걸고 와인을 따라주며 주문도 받는다. 주문 받은 메뉴를 내오기 위해 재료부터 구한다. 구운 감자를 주문하면 씨부터 뿌리고, 생선을 주문하면 얼음낚시를 하는 식이다. 유튜브 콘텐트처럼 마술적인 ‘먹방 쇼’는 눈을 의심하게 하는 희한한 볼거리다. 테이블보를 걷어내면 반전이 시작된다.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장엄한 퍼포먼스에 관객도 힘을 보태야 한다.

공연에는 매일 조금씩 다른 실제 음식이 잔뜩 소모된다. 와인과 양파·당근·샐러리·감자·달걀·방울토마토·사과 등 20여 종의 먹방을 위해 매일 새로 장을 봐야 한다. 한국 공연 때는 공연장 인근 식당에서 식재료 아이디어를 얻을 예정이란다.

매일 새로운 재료와 관객이 무대에 오르기에 우연한 해프닝이 공연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뉴욕에서는 한 관객이 테이블 위에 얹어 놓은 플라스틱 텀블러를 즉석에서 소품으로 활용해,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원숭이들이 모노리스를 발견하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된 적도 있다.

한국 5회차 공연 20분 만에 매진

지난해 에딘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서 가장 핫했던 공연 ‘푸드’. 관객이 무대에 올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머시브 퍼포먼스’다. [사진 강동문화재단]
볼거리가 전부는 아니다. 오감을 총동원해 참여하다 보면, ‘푸드’란 것이 농사를 지어 얻은 단순한 음식에서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음식으로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지난해 에딘버러에서 공연을 직접 관람한 김승미 공연전시팀장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디서 왔고 그걸 먹는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수많은 음식들에 얽힌 나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보면 좋을 것”이라고 관전포인트를 짚었다.

더 흥미로운 건 공연장이다. 마니아들이 환영할 혁신적 무대를 기초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공극장이 아시아 초연으로 들여왔다는 것이 놀랄 만하다. 강동아트센터는 2011년 전문공연장으로 손색없는 시설을 갖추고 개관했지만, 몇 년 새 구민회관 수준의 라인업으로 전락했던 게 사실이다. 공연예술을 선도하는 에딘버러 최신작 중에서도 가장 핫한 ‘푸드’를 과감히 들여온 건 앞서가는 공연기획으로 정평 난 LG아트센터 출신 심우섭 강동문화재단 대표가 나서서 공주문화관광재단·광주아시아문화전당 등 공동제작 파트너를 끌어들인 결과다. 지역 공공극장 운영의 혁신 사례로 꼽힐 만하다.

심우섭 대표는 “변방의 지역공연장을 넘어 동남권을 대표하는 공연장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게 구청장과 나의 공감대”라면서 “공공 공연장으로서 다양성과 공공성을 보장하되, 차별성을 꾀하기 위해 사업예산의 30%는 고품격 시그니처 공연으로 포트폴리오를 짰다. 공공 공연장들이 힘을 합쳐 컨소시엄 체계를 갖추면 얼마든지 해외단체와 직접 거래할 수 있는 바잉파워를 갖고 고품격 공연을 유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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