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명문가 신분·재산 내려놓고, 만주로 망명해 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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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② 석주(石洲) 이상룡
칼 끝 보다도 날카로운 저 삭풍이
내 살을 인정 없이 도려내네
살 도려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애 끊어지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차라리 이 머리 베어지게 할지언정
이 무릎 꿇어 종이 되지 않으리라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1911년 한겨울 압록강을 건너면서 지은 글이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났으나 일제강점기를 맞자 일신상의 안위를 버리고 만주로 망명해 항일운동에 진력하신 선생은 1858년 경북 안동 임청각(臨淸閣)에서 3남3녀 중 장남이자 종손으로 태어났다. 보물 제182호인 고성이씨 가문 종택 임청각은 1519년에 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으나 일제 때 중앙선 철로가 지나가게 하면서 절반이 철거당해 지금은 50여 칸만 남아 있다. 선생을 비롯해 3대에 걸쳐 11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의 산실로 현재 철로폐쇄 등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3대에 걸쳐 11명 독립유공자 서훈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한 52세의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 신민회 인사들과 만나면서 그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안창호, 이동휘, 이회영, 신채호 등이 주축이 된 신민회는 해외에 독립전쟁기지를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고 선생의 구국방안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에 그는 해외망명을 결심하고 결행한다.
선생은 먼저 그동안 임청각에서 집안일을 해오던 머슴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렸다. 위패를 땅에 묻고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다. 1911년 음력 1월 5일 추풍령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성을 거쳐 신의주에서 가솔 50여명과 합류해 1월 27일 걸어서 압록강을 건넌 후 단동을 경유해 서간도의 회인현 횡도천(橫道川)에 도착해 파란만장한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최종 목적지는 유하현 삼원포였지만 혹독한 추위와 열악한 여건으로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이다. 망명 초 아들 이준형을 보내 임청각까지 처분토록 했으나 현금화에 실패하자 문중에서 자금을 모아 보내기도 했다. 당시 임청각은 여느 살림집 20채 가격이었다고 한다.
이 무렵 삼원포에는 이회영 6형제, 김동삼, 이동녕 등이 자리 잡으면서 1911년 4월 서간도 최초의 한인자치기관이자 이후 독립운동단체들의 모태가 된 ‘경학사(耕學社’를 창설하게 되는데 선생이 초대 사장에 추대되었다. 한인들은 경학사를 중심으로 뭉쳐 척박한 만주 땅을 개간하고 한인사회의 기반을 구축해 나갔으며 삼원포는 애국지사들의 활동거점이 되었다.
한편 1912년에는 경학사를 대체해 한인자치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통화현 합니하에서 ‘부민단(扶民団)’을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서간도를 비롯한 연해주, 북간도, 하와이,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던 중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정세가 급변하면서 박은식, 이상룡 등 39인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무장투쟁노선을 천명한다. 이어 1919년 기미독립선언 이후 선생과 서간도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부민단, 자신계 등의 조직을 통합해 서간도 최대의 한인자치기구 ‘한족회(韓族會)’를 발족시킨다.
이와 함께 선생은 무장투쟁을 위한 조직으로 ‘군정부(軍政府)’를 출범시켜 총재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선생의 뜻에 따라 군정부의 ‘정부’ 명칭은 상해에 양보하고 군 정부를 ‘서로군정서’로 변경하고 선생이 독판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북간도에는 ‘북로군정서’가 조직된다. 이렇게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했고 선생은 고향에서 추가로 가져온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대원들을 국내에 진공시켰다.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잔인하게 진압과 보복에 나섰고 선생에게도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고구려·발해, 민족의 정통으로 삼아
국무령 퇴임 후 만주로 돌아와 투쟁을 계속하면서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거처를 옮기다 1931년에는 길림성 서란현 소과전자로 이주한다. 70대의 선생은 다리가 마비되고 체력이 약화되었으나 각지에서 문병 온 동지와 후배들에게 “외세 때문에 기운을 잃지 말고 더욱 힘써서 노부(老夫)의 마지막 소망을 버리지 말아주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동생들은 먼 길을 찾아와 환국을 간곡히 권하였으나 “죽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 거절하고 1932년 향년 75세를 일기로 장엄했던 일생을 마감하면서 “국토가 회복되기 전에는 잠시 나를 여기에다 묻어두라”고 유언을 남겼다.
선생은 민족사관을 주창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1913년 신흥무관학교 교재로 『대동역사(大東歷史)』를 저술하고 직접 강의했으며 “만주는 단군 성조의 영토이며 고구려의 강역이나, 비록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복식과 언어가 같지는 않지만 선조는 동일종족민족, 이역(異域)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단군의 혈통은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3000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선생의 고성이씨 가문 9세손이자 고려 말 수문하시중을 지낸 행촌 이암은 단군조선에 관한 역사서 『단군세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1943년 독립운동가 권상규는 선생을 기리는 행장을 다음과 같이 썼다. “공은 처음으로 중국 동쪽 여러 나라의 지지(地誌)와 역사를 널리 고찰하여 바로 잡아서 만주가 조선의 뿌리가 되는 땅임을 밝혔고, 고구려와 발해를 민족의 정통으로 삼았는데, 이는 모두 다 국통을 높이고 그리고 국민정신을 함양하고자 함이었다.”
선생은 만주무장독립투쟁의 선봉에선 독립운동가,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본 선각자,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미련 없이 대의를 선택한 실천가, 민중의 힘을 결집하고 조직화한 지도자, 한민족고대역사 복원에 힘쓴 역사학자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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