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에는 거부했던 간호법, 전공의 이탈하니 제정하겠다?
당정, 1년 전 대통령 거부권 행사한 간호법 제정 추진 검토도
“비상경영에 돌입합니다. 환자가 적은 병동을 폐쇄하고 해당 병동에 근무하는 간호사 인력을 재배치하며, 무급휴가도 실시하겠습니다.”
2024년 3월8일 오후, 울산대병원은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내용이 담긴 비상경영 운영을 예고했다. 울산광역시의 유일한 상급종합병원인 울산대병원은 2월20일부터 시작된 전공의(인턴·레지던트) 이탈로 수술환자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 전공의들은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증원 방침에 반발하며 집단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울산대병원에선 소속 전공의 126명 가운데 80∼90%가 병원을 떠났다. 전공의 이탈로 60억원대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한 울산대병원이 비상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경영진의 일방적인 통보는 간호사 등 병원 노동자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전환배치 따르지 않을 거면 무급휴가 가라”
울산대병원의 비상경영 내용에는 △무급휴가 도입 △연장근로 제한 △병동 통폐합 및 인력 전환배치 등의 내용이 담겼다. 병원은 수술 건수가 급격하게 감소한 36병동(정형외과, 재활의학과)과 71병동(심장혈관흉부외과, 안과, 성형외과)을 폐쇄하고 입원환자를 다른 병동으로 이동시켰는데, 해당 병동에 근무하던 간호사 80여 명의 근무 부서를 바꾸겠다고 했다. 중환자실과 응급실 위주로 간호사를 전환배치한다는 발표에 간호사들은 당혹스러운 분위기다. 병동마다 환자를 간호하는 방식이 다르고 교육 내용도 다르기 때문에 경험이 적은 저연차 간호사들은 업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병원은 막무가내였다. “전환배치에 따르지 않을 거면 무급휴가를 가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간호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병원과 노동자들이 체결한 단체협약을 보면, 전환배치를 할 경우 노동자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고 최소 2주 전에 통보하도록 정하고 있고, 병원 사정으로 휴업해야 할 때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휴업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울산대병원 구성원들의 누리집 게시판에는 병원의 비상경영 방침을 비판하는 글이 쏟아졌다. 폐쇄된 71병동에 근무하는 한 간호사는 “(전공의 이탈) 사태가 장기화하면 다른 병동으로도 폐쇄가 이어질 수 있는데 일방적인 통보로 간호사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며 “코로나19 유행 중에 병동을 수차례 통폐합할 때도 싫다는 이야기 한번 않고 묵묵히 일했지만 병원에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고 썼다.
울산대병원에서 일하는 6년차 간호사 ㄱ씨는 <한겨레21>에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뒤 간호사들이 환자들의 헤모박(피주머니) 교체나 중심정맥관 삽관 등도 다 떠맡아 하는데 환자들도 불안하게 바라보는 상황”이라며 “간호사의 근무환경마저 나빠지면 환자들은 더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전공의들이 떠나면서 수술·입원 환자를 줄이는 병원은 울산대병원뿐만이 아니다. 전북대병원과 원광대병원 등 지역 상급종합병원들도 일부 병동을 폐쇄했고, 병상 가동률이 30%로 떨어진 제주대병원은 최근 일부 간호사가 무급휴가에 들어갔다. 하지만 보건당국은 간호사들의 무급휴가에 대해 “병원들이 환자 수가 줄다보니 재정적 압박을 느끼고 그것을 타개하는 하나의 일환이라고 들었다”며 “강요돼서는 곤란하고 재정이 어렵더라도 기본적인 근로관계가 존중되는 범위 내에서 운영돼야 한다”고 원론적인 방침만 짧게 밝혔을 뿐이다.
전공의 빈자리 채우려 진료지원간호사 업무 ‘양성화’해도…
전공의들이 하던 업무를 떠안은 간호사들도 있다. ‘진료지원간호사’로 불리는 전담(PA)간호사와 전문간호사들이다.
언론은 정확한 기준 없이 용어를 섞어 사용하는데, 이들의 업무가 법제도로 규정되지 않은 현실을 방증한다. PA(Physician Assistant)는 미국에서 운영하는 체계로 의사의 진료 업무를 돕는 보건의료 인력을 지칭한다. 미국에선 PA에 간호사뿐만 아니라 응급구조사 등 다양한 인력이 포함된다. ‘전담간호사’는 병원마다 차이는 있지만 ‘의료진의 책임 아래 의사 업무 중 일부 의료행위를 위임받아 수행하는’ 간호사를 뜻한다. 대한간호협회는 의사 업무를 대신하는 전담간호사가 2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전문간호사’는 의료법에 따라 간호실무 3년 이상 경력을 가진 간호사가 대학원에서 전문간호사 과정을 2년 이상 이수한 뒤 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야 취득할 수 있다. 이런 구분 없이 언론에서 주로 지칭하는 PA 간호사는 대개 전담간호사를 일컫는다.
보건복지부는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2월27일부터 ‘진료지원인력 시범사업 ’을 실시한다는 내용을 발표하고 3월7일 ‘간호사 업무 관련 시범사업 보완 지침’을 내려보내 8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정부의 보완 지침을 보면, 간호사들은 응급상황에서 심폐소생술과 응급약물 투여를 할 수 있고 혈액 등 각종 검체 채취와 심전도·초음파 검사, 코로나19 검사도 할 수 있게 됐다. 전담 간호사와 전문 간호사는 (의사로부터 ) 위임받은 검사와 약물 처방도 할 수 있고, 수술 부위 봉합도 할 수 있게 됐다. 전문간호사는 중환자를 상대로 중심정맥관 삽입·관리도 할 수 있다. 정부의 시범사업 이전에 이런 진료는 의사의 고유 업무로 의사가 아닌 간호사가 할 경우 ‘불법’(의료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
정부의 이런 지침에도 의료 현장에선 “바뀔 것이 없다”는 평가가 나왔다. 병원에선 불법인 줄 알면서도 부족한 의사 인력을 대신해 이미 전담간호사가 이 업무들을 수행하고 있었다. 수도권 한 대학병원에서 전담간호사로 10년 넘게 근무한 ㄴ씨(전문간호사)는 “우리 병원에선 200명 넘는 간호사가 이미 10년 전부터 처방전을 내고, 중심정맥관 삽입·관리 등 의사 업무를 일부 대신하고 있었다”며 “평소에는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보이지 않던 전담간호사 업무가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면서 드러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갑작스레 간호사에게 의사 업무를 전가하면서 혼란이 가중됐다는 목소리도 있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전담간호사 ㄷ씨는 “(떠난) 전공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병원에서 전담간호사를 늘리라고 해 다른 부서에서 인력을 받아 급작스럽게 교육하고 있다”며 “전공의 진료 업무에 간호사 교육 업무까지 떠안았지만 추가로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한간호협회에는 3월14일 오전 9시까지 진료지원 사업 등에 대한 불만 등 현장 간호사들의 고충신고가 230건 접수됐다고 밝혔다.
현장 진료지원간호사들은 전공의 이탈이라는 위기상황이 끝나면 정부의 시범사업도 끝나고 자신들의 업무가 다시 법의 사각지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한다. 코로나19 유행 중 정부의 ‘공공의대 설립’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났을 때도 진료지원간호사가 의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업무를 대신했다가 의사들로부터 “무면허 의료행위를 했다”고 고발당했다. 하지만 정부는 아무런 보호 조처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부가 처음으로 진료지원 업무를 공식화하고 나선 만큼 시범사업에 그치지 않고 법제도 보완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한국전문간호사협회 최수정 회장은 <한겨레21>에 “간호사가 하는 업무를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간호법 제정을 포함한 법제도 보완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시범사업에서 허용된 업무들이 잘 수행되려면 현재 의료현장에서 도제식으로 이뤄지는 교육을 체계화해 의료서비스 질 관리를 하고 해당 업무에 대해 의료 수가도 지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의사 업무 대신하다가 ‘무면허 의료행위’ 고발당해
정부도 전공의 이탈 장기화로 의료 공백이 길어지면서 환자들이 어려움을 겪자 간호법 제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3월8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에서 “대한간호협회에서 새로운 간호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며 “정부는 국민 보건체계를 강화하는 의료개혁에 간호사 의견을 경청하고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은 간호사 업무를 별도 법이 아닌 의료법 제2조에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라고 짤막하게 명시할 뿐이어서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1951년 제정된 국민의료법에 기반한 현행 의료법은 ‘치료’와 ‘의사’ ‘병원’ 중심으로 정리돼 예방·관리·보건 등으로 진보한 건강 개념을 포괄하지 못한다. 빠르게 고령화하는 한국 사회를 위해서 간호서비스가 병원을 벗어나 지역사회와 요양원, 보건소 등으로 확대되려면 별도 간호법을 제정하고 간호사의 역할을 새롭게 독립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배경 위에 2023년 4월 간호법이 제정돼 국회를 통과했지만, 문제는 지금과 달리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간호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대한의사협회 등이 간호법 제정에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당시 “유관 직역 간의 과도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간호 업무의 탈의료기관화는 국민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초래한다”고 거부권 행사 이유를 밝혔다.
이러니 간호사 사이에선 윤석열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공의 사직서는 수리하지 않아서 지난달에 임금을 줬다고 하는데, 우리 간호사들은 무급휴가를 가라고 하잖아요. 전공의 업무는 전담간호사에게 보상도 없이 떠넘겼고요. 결국 정부나 병원이 우리를 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윤석열 정부는 2023년 국회가 통과시켰던 간호법에도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런 정부를 믿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경남 지역의 한 상급종합병원 중환자실에 근무하는 20년차 간호사 ㄹ씨의 말이다.
“간호사 이용해 의료개혁 추진… 앞뒤 맞지 않는 이야기”
전공의 이탈이라는 보건의료 위기 상황과 간호법 제정 논의는 같은 선상에서 두고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는 비판도 나왔다. 김원일 건강돌봄시민행동 활동가는 “의대 증원에 의사들이 반발하니까 정부가 의사 진료를 보조했던 간호사들을 이용해 의료개혁을 추진하고 당근으로 간호법을 꺼내들었는데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라며 “의사 수 부족 문제는 의과대학 증원과 의료법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고 간호법 제정은 진료가 아닌 지역사회 보건·간호·돌봄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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