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사위와 현직 대통령 아들이 정·부통령으로

한겨레 2024. 3. 1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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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홍명교의 이상동몽
인도네시아 대선과 퇴행
프라보워, 학생운동가 살해 의혹
기브란, 러닝메이트 출마 위해
40살 피선거권 헌법 조항 수정
노동당 총선 결과 ‘미래 가늠자’
지난 2월10일(현지시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유세에서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 후보(오른쪽)와 러닝메이트인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가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인도네시아 정치는 평범한 이들을 망각의 늪으로 빠뜨린 걸까. 지난달 14일(현지시각) 약 1억6천만명(78.1%)이 투표한 가운데 대선과 총선이 치러졌다. 복수의 기관들이 실시한 표본조사에 따르면 독재정권의 상속자 프라보워 수비안토(72)가 56~58%를 득표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오는 20일에 마무리될 개표의 결과는 이변이 없는 한 프라보워의 당선을 가리킬 것이다.

고모부가 조카 출마 길 터줘

프라보워는 32년에 걸쳐 인도네시아의 독재자로 군림한 수하르토의 사위다. 당시 특수부대 지휘관이었던 그는 13명의 학생운동가를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1983년 수백명이 사망한 진압 사건, 파푸아와 동티모르에서의 인권 침해에 연루된 혐의도 받고 있지만 이번 선거의 쟁점이 되진 못했다. 선거운동 기간 프라보워는 틱톡을 통해 친근한 이미지를 쌓았는데, 이런 영향 때문인지 적지 않은 20대 청년들은 수하르토 시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상을 열렬하게 공유했다. “수하르토가 다시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어요” 같은 댓글도 함께였다. 이런 현상에 대해 학생운동가 스테파니 이스칸다르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청년들이 어두운 과거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소셜미디어 선거 캠페인에 영향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번 선거 유권자의 절반 이상은 20·30대다.

문제는 프라보워만이 아니다.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36)는 현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하 ‘조코위’)의 아들인데다, 여러 초법적 일탈 끝에 선거에 출마했다. 인도네시아 헌법은 한국처럼 만 40살 미만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제한하고 있다. 이 규정을 둘러싼 헌법재판이 진행됐지만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는 선출직 경험이 있으면 40살 미만이어도 출마가 가능하다는 부속조항을 만들며 기브란의 출마 길을 터줬다. 당시 헌재 소장은 조코위 대통령의 매제인 안와르 우스만이었다.

조코위와 프라보워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컸다. 선거 이틀 전인 2월12일 족자카르타에선 수백명의 대학생과 활동가들이 “조코위와 측근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자”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투표 이튿날인 15일엔 대학생 100여명이 대통령궁 앞에 모여 “차기 정부는 끔찍한 인권 침해 전력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투표 사흘 전인 11일에는 ‘더러운 투표’라는 제목의 2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가 유튜브에 공개됐다. 인도네시아의 헌법 전문가들이 출연해 정권 차원의 부정선거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조코위는 공정하게 대선을 관리해야 할 선거관리위원회에 ‘자기 사람’을 꽂아 넣었다. ‘더러운 투표’는 24시간 만에 500만 조회수를 기록했지만, 판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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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와 온라인 캠페인의 조합”

인도네시아 국민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지난 10년 조코위는 높은 인기를 누렸다. 임기 말에도 지지율 70%가 넘을 정도였다. 여기엔 그의 소박한 이미지, 가난한 목수의 아들에서 대통령까지의 자수성가, 과단성 있는 리더십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조코위가 받쳐주고 기민한 소셜미디어 전략이 이뤄지면서 프라보워의 독재자 이미지가 희석된 것이다. 정치연구자 이브 워버턴은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전투적인 민족주의와 정교한 온라인 캠페인의 조합”이 프라보워에게 승리를 안겨줬다고 평가했다.

자유주의 성향의 중산층 시민들은 선거 결과에 적지 않은 실망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수하르토 시대처럼 교사가 학생의 가방을 뒤져 ‘불온서적’을 찾고, 언론·결사의 자유까지 금지하는 건 아닐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그러나 정치분석가 울릴 압샤르 압달라는 일간지 ‘콤파스’ 칼럼에서 “대중이 여전히 조코위 스타일의 발전을 바란다는 점을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이 승리는 “윤리 위반으로 인해 명백히 오염됐”지만, “좋든 싫든 대중의 생각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 독재자를 다시 등극시켰다는 것은 “중산층의 지적 편견”에 따른 공포에 불과하다. 더구나 지식인들의 비토 정서는 대중 여론과 유리돼 있다. 그렇다면 다른 후보라면 나았을까? 프라보워의 적수였던 다른 후보들과 주요 정치 세력 역시 우익 포퓰리즘과 강경 이슬람주의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이들 중 누구도 인도네시아를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통치하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그나마 신생 정당 노동당의 성적표가 인도네시아 정치의 발전 가능성을 기대할 가늠자가 될 수 있다. 2021년 해고와 외주화를 용이하게 할 노동 개악에 맞선 총파업의 성과를 바탕으로 창당한 노동당은 이번 총선에서 총 1만5968명의 노동자·서민을 후보로 내세웠다. 물론 선거운동 기간 2% 안팎에 그치던 지지율이 원내 진출을 위한 4% 문턱을 넘기란 쉽지 않을 수 있다.

프라보워는 조코위처럼 계속해서 민주주의를 훼손하겠지만, 군부독재라는 나쁜 유산을 불러오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사유화된 폭력과 국가’에 대해 연구해온 압딜 무기스 무드호피르는 인도네시아의 진보 언론 ‘인도프로그레스’에 쓴 칼럼에서 인도네시아의 정치제도가 “정치·경제적 자원의 분배를 협상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에 과거처럼 강력한 독재 권력이 만들어지기 어렵다고 분석한다. 민주주의 기반이 침식될 가능성은 크지만 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낡은 체제의 전환을 꿈꾸는 이들은 독재가 귀환하고 있다는 겁박에 놀라 자신의 대중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일을 포기하거나, ‘차악’으로 간주되는 세력의 품에 굴복해선 안 된다. 시스템 자체를 바꿀 대안을 제시하고, 대중의 역량을 확장하기 위해 계속해서 세력을 모으고 싸워야 한다. 다행히도 노동당은 어느 주류 정당의 편도 들지 않겠다는 ‘비동맹’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독자성을 잃으면 노선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는 지난 경험 때문일 것이다. 반면 오늘날 한국의 주류 시민사회단체 원로들은 영혼도 이념도 모두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내준 지 오래다. 위성정당 사태만 봐도 그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쉽게 알 수 있다. ‘낡은 체제’로의 회귀를 막을 가장 강력한 힘은 민중 자신이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것에 있는데, 이는 과거의 구태를 반복하거나 깃발을 내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운동이 성장해 미래의 토대를 만드는 것 말곤 다른 방법이 없다.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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