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현대사·대중문화사 궤적 함께한… 오래도록 기억될 '학전'의 네 번의 봄
꾸준히 공연사에 새로운 의미 부여한 상징적 공간
폐관부터 역순으로 보는 학전의 기념비적 순간
봄에 찾아왔다 서른세 번째 봄을 맞으며 우리 곁을 떠났다. 서울 대학로 공연문화의 산실인 학전이 개관 33년 만인 15일 문을 닫았다. '아침이슬'과 '상록수'를 지은 싱어송라이터 김민기 대표가 만든 학전은 존재 자체로 한국 대중문화사의 큰 일부였다. 359개 작품을 기획·제작했고 770명 넘는 배우가 거쳐 갔다. 삶에 지친 관객에겐 위로와 추억을 선사했다.
김 대표는 문화의 못자리를 꿈꾸며 '배움의 밭(學田)'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대학로에서 잘 자란 모가 이곳저곳으로 이식돼 다양한 꽃을 피우게 하고 싶었다. 다양성을 잃고 상업적으로 획일화돼 가는 지금의 공연예술계에서 살아남기엔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암 투병 중인 김 대표의 건강 악화 문제도 겹쳤다.
공연계에 다양성의 씨를 뿌린 학전의 도전과 실험의 순간을 마지막 공연부터 역순으로 되돌아봤다.
2024년 봄, 아름다운 이별
"김민기 선생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깨달을 만하니 문을 닫네요."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숭동 학전블루 소극장. 배우 황정민은 "학전은 문을 닫아도 학전의 정신은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남을 것"이라며 "슬프긴 하지만 막 슬프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학전의 마지막을 함께한 릴레이 공연 '학전 어게인 콘서트' 마지막 20회 무대에서다. 황정민과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 박학기, 한영애, 권진원, 알리, 정동하, 한영애 등이 김 대표의 곡만을 노래하는 '김민기 트리뷰트' 공연이었다. 학전과 인연이 있는 33팀의 가수와 배우들은 지난달 28일부터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열어 왔다. 설경구, 장현성, 이정은, 윤도현, 윤종신, 김현철, 장필순, 동물원, 나윤선 등이 출연료 없이 참여한 공연은 20회분 티켓이 예매 10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황정민은 오디션에 합격해 학전 1기로 활동하며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 출연한 과거를 떠올렸다. 그는 "열정만 가득했던 20대 빨간 얼굴을 가진 아이에게 기본을 강조하신 김민기 선생님의 가르침은 짜증 나고 지겨운 일이었을 것"이라며 "그 교훈이 지금 배우 활동의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고 말했다.
학전의 마지막 밤은 황정민의 말처럼 슬프지만은 않았다. 전반부를 이끈 노찾사와 권진원이 눈물을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출연진은 눈물을 애써 참으며 객석을 향해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동하는 '천리길'과 '새벽길'을 빠른 템포로 편곡된 버전으로 불렀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 총연출을 맡은 조경식 HK엔터프로 이사는 "김민기 선생님은 '인간은 잊혀질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며 "장송곡처럼 꾸미기보다 신나는 노래들로 학전을 아름답게 보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객석의 슬픔이 더 컸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만 다섯 번째 관람했다는 50대 김모씨는 "아쉽지만 학전의 정신만은 잊혀지지 않았으면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관객들은 전 출연자가 함께 부른 앙코르곡 '아침이슬'을 목청껏 따라 부르며 아쉬움을 달랬다.
2006년 봄, '지하철 1호선' 3000회 돌파
황정민은 2006년 봄에도 학전에서 특별한 무대를 가졌다. 1994년 5월 초연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한 극단 단일 공연으로는 처음으로 3월 29일 3,000회를 돌파했다. 당시에도 이미 흥행 배우였던 황정민은 조승우와 함께 '3,000회 기념 특별공연'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1994년 5월 14일 첫 공연을 올린 '지하철 1호선'은 학전의 간판 공연이다. 중국 연변에서 온 '선녀'의 눈으로 실직 가장, 가출 소녀, 잡상인, 노숙인 등 서울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독일 그립스 극장의 '리니에 아인스(Linie 1)'를 번안했다.
'최초' 타이틀이 많다. 200석 안 되는 극장에서 제작비 출혈을 감수하며 라이브 연주로 무대를 완성한 첫 시도였다. 1,000회 공연을 넘어선 2000년엔 독일 그립스 극장이 작품성을 인정해 이례적으로 공연 저작권료를 면제해 줬다.
자본 논리에 역주행하며 출연자와 연주자가 일정 지분으로 수입을 나누는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공연은 4,257회까지 이어졌다.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 등을 배출했고 누적 관객 70만 명이 다녀갔다.
2004년 봄, 어린이를 생각하다
2004년 봄엔 김민기 대표가 어린이극 연출가로 변신했다. 5월 5일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우리는 친구다'의 막을 올렸다. '지하철 1호선' 원작자가 만든 독일 어린이극 '막스와 밀리'를 한국 정서에 맞게 번안했다. 학원을 12개나 다니는 아이, 부모의 이혼 후 겁쟁이가 된 아이 등을 통해 한국의 교육 환경과 아이들의 고민을 다룬다.
어린이·청소년 문화에 대한 김 대표의 고민은 매우 깊다.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다른 공연장이 좀처럼 올리지 않는 어린이극을 꾸준히 선보였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무적의 삼총사' '진구는 게임 중' 등을 '학전 어린이 무대' 시리즈로 선보였다. '모스키토' '굿모닝 학교' '복서와 소년' 등은 '학전 청소년 무대' 시리즈로 선보였다.
김 대표는 "아이들을 어른의 잣대로만 보지 말고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며 "아이들도 온갖 고민과 소망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라고 인터뷰 등을 통해 수차례 강조했다. 환상적인 내용 또는 교육적인 것에 한정된 어린이극의 지평을 삶의 리얼리즘으로 넓히고자 했다. 기존 아동극에서 상투적으로 쓰던 어린이를 흉내 내는 말투나 과장된 표현도 쓰지 않았다. "배우들이 아이들의 말투를 과장해 흉내 낸다고 해도 공연을 보는 관객이나 어린이들은 배우가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올해 초 뮤지컬 '고추장 떡볶이' 시식 이벤트 진행을 위해 학전블루 소극장을 찾은 배우들은 "아이들을 흉내 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린이극이 '지하철 1호선' 연기보다 더 힘들다고 하는 배우도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91년 봄, 김민기의 기획·제작 소극장
한국 대중문화계에 원조 아이돌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시기로 기억되는 1991년. 같은 해 봄은 서울 대학로 소극장 공연 문화의 상징인 학전의 궤적이 시작된 시기다. 3월 15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서울 문리대 교수식당 자리에 학전블루 소극장이 들어섰다. 기존 소극장들의 대관 중심 운영을 탈피하고 다양한 예술 형태를 접목해 기획·제작에 역점을 둔 실험 공간을 표방했다. 개관 기념 공연엔 김덕수패 사물놀이 팀을 비롯한 9팀이 초청됐다.
연극과 콘서트, 뮤지컬 등을 병행하면서 콘서트 수요가 늘자 1996년 5월 1일엔 뮤지컬 전용극장인 학전그린을 따로 개관했다. 이후 학전블루는 콘서트에 더 많은 시간이 할애되면서 고(故) 김광석, 노영심, 동물원 등이 데뷔하고 성장했다. 학전그린은 건물주가 바뀌며 건물 사용 용도가 변해 2013년에 폐관됐다.
이렇게 시작돼 이어져 온 학전의 역사는 33년 만인 15일 모두와 작별을 고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학전의 정신을 이어받아 7월 이후 이 소극장을 새롭게 활용할 계획이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기획한 가수 박학기는 14일 공연을 마무리하면서 "이곳에서 30년 전의 박학기를 여러 번 만났다"며 "오늘이 슬프다기보다 마음속에 이 아름다운 것들이 남아 있는 것이 행복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공연이 끝난 뒤 출연자와 관객들은 "이곳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분이 2024년 봄의 나를 만날 수 있는 자리로 남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을 오래 마음에 품으려는 듯 쉽사리 극장 앞마당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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