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리더의 소통] 비우고 버리는 것도 용기

2024. 3. 1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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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추억 깃든 트렌치코트
낡아 기능 다했지만 못 버려
새로움은 여백에서 피어나
헤어질 땐 헤어질 수 있어야

강연 출장을 떠나기에 앞서 옷장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그 옷을 버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날씨 변화가 심한 계절 특성을 고려해 트렌치코트를 챙기려는 내 모습을 본 아내의 조심스러운 제안이었다. 소매와 목 부분이 낡고 슬었지만,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던 것은 옷에 얽힌 사연 때문이다. 25년 전 영국 런던에 출장을 갔을 때 직장 동료가 내 몸에 맞는 옷을 찾느라 아웃렛 매장 점원에게 부탁해 창고를 뒤져 간신히 구할 수 있었다. 화려하지 않고 그리 비싸지 않아도 착용할 때마다 왠지 편한 옷이었다. 가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치였고, 그 옷을 입을 때마다 동료를 향한 고마움이 떠올랐다.

트렌치코트는 출장을 다닐 때마다 자주 동행하며 볼품없는 나를 실제보다 더 있어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짜릿한 승리와 비통한 패배, 배신의 쓰라린 순간에도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바람과 추위를 막아주는 옷이라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인생의 파토스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영혼의 단짝과도 같았다. 퇴직 후 강연이라는 낯설고 새로운 세계에 입문했을 때도 큰 힘이 되어주었다. '인문학이 경영을 만났을 때' 같은 주제로 이야기할 때면 의식적으로 이 트렌치코트를 입고 갔고 결과적으로 훌륭한 보조 교재 역할을 하였다. 강연이 끝날 때면 이 옷을 만져보고 싶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니까.

새로운 것만 주목받는 시대에 오래될수록 빛나는 것으로 흔히 인문학과 와인을 꼽는다. 저명한 마케팅 전문가 세스 고딘이 강조했던가? "사람들이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것은 인간관계, 스토리 그리고 마법과 같은 어떤 것이다." 인문학의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다. 스토리텔링의 마법 사례를 들 때 나의 트렌치코트는 종종 등장하였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오래되면 자칫 빈티 나 보일 수도 있다. '빈티'가 나 보일 수도 있는 것을 '빈티지'의 황금으로 바꿔주는 데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 평범한 금속을 황금으로 탈바꿈시켜 주는 연금술사처럼 스토리텔링은 마법을 부린다. 단순히 오래되었다고 빈티지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희귀성의 원칙에 부합되어야 한다. 흔하지 않아야 대접받는다. 시간이라는 이름의 잔인한 마모성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고전처럼 나의 트렌치코트도 4반세기를 견뎌냈다. 트렌치코트는 저 혼자만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러의 치열한 경쟁 세계에서 나를 살아남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 어찌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과 생명체가 그러하듯 감정이 없는 물건과도 인연을 접어야 할 때가 온다. 돌이켜보니 지난겨울 동안 단 한 번도 입은 적이 없었다. 낡아도 너무 낡아서 옷으로서 기능을 다했다.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인연을 마무리하는 것도 용기다. 전쟁터에 나가서 막강한 적들과 맞서 싸우는 데 용기가 있어야 하듯이, 오랫동안 정을 주고 감정이 배어 있는 것과 헤어지는 데도 결단력이 요구된다. 출장 가는 날 차마 내 손으로 버릴 수는 없어서 식구들에게 부탁했다.

조각이란 덧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덜어내는 작업의 연속이라고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말했던가. 조각에서만 비우고 덜어내야 하는 건 아니다. 아까워도 군더더기와 불필요한 것을 덜어낼 줄 알아야 한다. 내친김에 불필요한 약속, 의미 없는 모임도 줄이기로 했다. 우리는 과잉 시대를 살고 있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유행에 동참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자칫하면 집착으로 이어지기 쉽다.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이들에게 집착은 적이 되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가득 찬 일정표에서는 새로움이 찾아올 공간이 없다. 일정표에도 여백이 있어야 한다.

[손관승 리더십과 자기계발 전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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