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책에 대한 책] "12세기 수도사의 독서란 포도밭 열매를 따는 수확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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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의 한 유명 서점을 가본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1128년 한 대수도원장이 당시 학생들을 위해 집필했던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을 독자와 함께 다시 읽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이반 일리치는 독서의 혁명적 변화가 12세기에 일어났음을 간파하고 독서법의 근원을 질문한다.
책에 적힌 한 행은 수도사에게 "포도를 지탱하는 포도 시렁의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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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의 한 유명 서점을 가본다. 유서 깊은 서점의 수많은 방문객에게 이 서점에 꽂힌 책들은 때로 숨 막히는 세상의 산소호흡기가 돼주곤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한 1000년쯤 지나도 인류가 건재하다면 현재 서점 책장에 판매 중인 책들 가운데 '그때도 읽힐' 책은 몇 권일까. 책엔 유통기한이 없다. 그러나 책은 언제나 시대정신과 함께 생멸한다.
반대로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대략 1000년 전 책들 가운데 현대에도 읽히는 책은 얼마나 될까. '텍스트의 포도밭'은 1128년 한 대수도원장이 당시 학생들을 위해 집필했던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을 독자와 함께 다시 읽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이반 일리치는 독서의 혁명적 변화가 12세기에 일어났음을 간파하고 독서법의 근원을 질문한다.
현대사회에서 지배적인 독서법은 묵독(默讀)이다. 잉크로 적힌 문자 텍스트를 응시하면서 소리 내지 않고 읽는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소리 내지 않고 읽기'는 고대사회에서 묘기에 가까웠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스승을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리둥절해했다고 전해진다. '디다스칼리콘'이 집필된 12세기에도 수도사들에겐 묵독보다 음독(音讀)이 일반적이었다. 입술을 움직이며 문장 안의 지혜를 귀로 흡수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읽은 것이다. 단어와 문장을 발음하면서 발생하는 소리의 박동은 세계가 개인의 내면으로 향하는 매질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책의 가치는 '지혜의 기록'에서 '지식의 저장'으로 변모했다. 음파를 통해 울림을 주며 정신을 깨우던 음독은 사라져간다. 저자는 책의 문장을 빨아 흡수하던 수도사들을 기억하며 쓴다. 책에 적힌 한 행은 수도사에게 "포도를 지탱하는 포도 시렁의 줄"이었다. 또 그들의 독서는 "행들로 열매를 따는 수확"에 가까웠다. 책은 한 권의 포도밭이었다. 단어 하나를 온몸으로 음미하고, 문장 사이를 여행하는 포도밭의 순례.
"책을 읽을 땐 무조건 소리를 내서 읽어야 한다"가 이 책이 주장하려는 본질은 아닐 것이다. 다만 책을 대하는 마음의 변화에 주목한다. 묵독도 좋고 음독도 좋다. 아니 정독, 열독, 숙독, 속독, 통독, 발췌독 등 그 어떤 독서법도 별 상관없다. '지혜의 빛이고 자아의 불'인 책 아래서 자기 자신을 깨달으라고 책은 쓴다.
"페이지에서 발산하는 빛에 자신을 드러내라. 그리하여 자신을 인식하라. 자신의 자아를 인정하라."
책은, 페이지는, 텍스트는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의 전언은 '너 자신의 자아를 알라'는 말로 수정돼야 한다.
성경이 한 권 크기로 작아진 건 13세기 무렵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재료가 두껍고 무거워 들고 다니지도 못했다. 한껏 압축된 성경의 질량은 줄였는데도 5㎏쯤 됐으니 휴대는 고달픈 일이었다. 경전이든 소설책이든 이제 인류사 수천 년의 기록을 고작 주머니 속에도 넣고 다닐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는 책 읽기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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