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들 충격받고 찾아와요"…강남서 뜨는 '이색 학원' [이슈+]

김영리 2024. 3. 1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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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 맞은 초등학교
"타자 빠르지만…글씨체 알아보기 힘들어"
"손으로 써야 문해력 길러진다"
글씨 연습을 하는 학생의 모습. /사진=바르고아름다운글씨교정학원 제공


"요즘 선생님들끼린 일기를 '판독'한다고 해요. 당최 알아보기 힘들어 학생을 불러 뭐라고 쓴 건지 물어보면 본인도 못 읽는 경우가 많고요."

경기지역에서 초등교사로 근무하는 30대 김모 씨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5학년 담임을 맡게 됐다. 그는 "저학년, 고학년 구분할 것 없이 해를 거듭할수록 아이들의 글씨체가 더 나빠지는 듯하다"며 "수업 시간에 자유 주제 글쓰기 활동을 하면 아이들의 글을 읽기조차 힘들 때가 많다"며 푸념했다.

다만 "대신 컴퓨터는 나보다 잘 다루는 친구들도 많다. 키보드를 치는 속도도 정말 빠르고, 영상 편집도 잘한다"고 설명했다. 비대면 수업을 진행할 당시에는 '줌(zoom, 원격 수업 플랫폼)' 사용법을 교사보다 더 잘 아는 학생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2010년 이후에 태어나 쿼티 키보드에 더 익숙한 알파 세대들이 본격적인 학령인구로 자리하면서, 교육 현장에선 "학생들의 글씨체가 점점 알아보기 힘든 수준으로 변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에 초등학생 대상 글씨 교정 학원이나 받아쓰기 앱 등 글씨 교육을 위한 서비스들이 성행하고 있는 모양새다.

대치동의 한 글씨교정학원 전경. /사진=독자 제공


학원가가 밀집돼있는 강남구에선 글씨 교정 학원이 성행하고 있다. 강남구 대치동 소재 'H' 글씨 교정 학원. 학기 중이라 오전 시간대에 학생은 없었지만, 연간 100명 넘는 초등생이 이곳에서 50회짜리 글씨 교정 프로그램을 수강한다. 주 2회 기준으로 비용은 월 20만원대다. 이 학원 원장 조중연 씨는 "전체 수강생의 60%가 초등학생"이라며 "코로나 시기 비대면 수업 이후 글씨 쓰기에 어려움을 겪어 수업을 문의하는 초등학생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방학 때 짧게라도 글씨 교정 수업을 들으려는 초등학생이 많다"며 "요즘에는 학교도 전자칠판이 많고 글을 쓸 수 있는 경험 자체가 적다 보니 연필 쥐는 법처럼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가르친다"고 설명했다. 

초등학생의 글씨교정 수업 후 교정 결과. /사진=바르고아름다운글씨교정학원 제공


강남구 대치동 소재 'B' 글씨 교정 학원을 10년째 운영하는 강종석 씨는 "3월에 초등학교 저학년을 중심으로 수업 문의가 많다"며 "학부모들이 아이의 알림장을 보고선 충격받아 오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이어 "현재 30명가량의 초등학생이 수업을 듣고 있고, 전체 수강생의 60% 수준"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요즘에는 종이와 연필 자체를 워낙 어색해해서 저학년의 경우 연필을 몇분 쥐고 있으면 손가락이 아프다고까지 한다"며 "글을 쓰는 경험이 전무해 근육 단련이 안 돼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이 학원 수료생 학부모인 40대 정모 씨는 "아들의 맞춤법이 엉망인데다 악필이라 글씨 학원을 등록했다"며 "처음에는 화면이 시시각각 변하는 디지털 기기와 다른 종이와 연필을 아예 지루해하더라. 글쓰기가 이렇게 힘든 거였나 싶다"고 토로했다.

받아쓰기 애플리케이션(앱)을 활용해 태블릿PC로 자녀의 악필 교정을 해봤다는 30대 학부모 김모 씨도 "초등학생 남자아이를 키우는데 심각한 악필"이라며 "앱 서비스로는 글씨 교정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엔 학원 숙제도 타이핑으로 해서 한글 타자는 150타 정도로 빠르다"면서 "소근육 발달 등 여러 방면에서 글씨의 중요성이 크다고 생각하는데 평소 글씨를 쓸 기회가 잘 없어 교정이 안 되는 상황"이라며 우려했다. 

알파 세대의 쓰기 능력 저하 현상을 걱정하는 건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캐나다 맥길대학교에서 발행한 2019년 과학사회부 뉴스레터에 따르면 노트북 타이핑을 활용해 공부한 실험집단이 펜과 노트를 이용한 집단보다 필기 속도는 빨랐으나 정작 학업 성취도는 반절 수준으로 훨씬 낮았다. 고연령층에서는 손을 많이 사용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의 기억력 손상도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40%가량 낮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대치동 학원가에 있는 글씨교정학원들. /사진=김영리 기자


일각에서는 이러다 손글씨 문화가 아예 자취 감출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수기로만 진행되던 국내 변호사 시험은 지난해부터 컴퓨터로 응시할 수 있게 됐다. 수기와 컴퓨터 중 선택이 가능했는데 시험 응시생의 99%가 컴퓨터 시험 방식을 택했다.

강종석 원장은 "변호사 시험이 수기로 진행됐을 때는 일명 '고시체' 강의도 많이 했다"며 "아무리 똑똑해도 기억보단 기록이 앞서고, 기록 중에서도 손의 근육을 이용해 수기로 필기해야 문해력과 작문 능력을 제대로 기를 수 있다"며 글쓰기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영리 한경닷컴 기자 smart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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