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80쪽에 켜켜이 담아낸… ‘사이’ ‘침묵’의 정수[북리뷰]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문학동네
작년 노벨문학상 욘 포세 신작
공개 직후 희곡으로도 발간해
지루한 삶에서 갈 길 잃은 남자
숲 속 무한 독백에 신비감 조성
“나는 고요함의 소리를 듣고 싶다. 침묵 속에서는 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는 귀를 기울인다, 내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때, 나는 들을 수 있다.”
2023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욘 포세가 신작 ‘샤이닝’으로 돌아왔다. 작년에 발표된 최신작으로 공개되자마자 ‘검은 숲속에서’라는 희곡으로도 발간돼 소설가이자 희곡작가인 포세의 저력을 보여줬다는 찬사를 받았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작가는 등단 40주년을 맞아 내놓은 작품에서 자신이 평생 동안 천착해 온 ‘사이’와 ‘침묵’의 정수를 단 80페이지 만에 남김없이 보여준다. 포세에 따르면 “말로 할 수 없는 것, 말하고 싶지 않은 것, 또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더 좋은 것들이 ‘사이’에 존재”하며 ‘사이’를 통해 ‘침묵’을 표현한다.
‘샤이닝’은 차를 몰고 정처 없이 떠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가 떠난 이유는 삶의 지루함이다. 그렇기에 목적도 의도도 없이 방향을 틀어가며 막다른 곳에 닿는다. 남자는 멈추지 않는다. 도로가 끝난 바로 그곳에서, 눈 속에 파묻혀 더 이상 차가 나아갈 수 없을 때 남자는 내려서 눈 덮인 숲 속의 어둠으로 들어간다. 포세가 그려내는 숲은 고요의 공간이다. 걸을 때마다 날 법한 “보드득” 소리도 한없이 내리는 눈이 쌓이는 “사르륵” 소리도 숲에는 존재하지 않고 완벽한 어둠과 침묵만이 가득하다.
“나는 말한다 : 나를 찾으러 오셨죠― 아무런 대답도 없다. 나는 분명 그들이 거기 서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도, 그들은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내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포세가 표현하고 싶다던 ‘말로 할 수 없는 것’, 침묵. 하지만 ‘말’뿐 아니라 ‘언어’ 자체를 뛰어넘는 것을 어떻게 ‘언어’로 써낼 수 있을까? 소설의 초반에는 남자만이 존재한다. 고요함 속에서 남자의 생각은 꼬리를 물고 엇갈린다. 그러다 그는 숲속에서 순백의 존재, 부모 그리고 검은색 양복의 남자를 차례로 만난다. 어떻게든 눈 덮인 숲에서 빠져나가려 말을 걸어보지만 유의미한 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포세는 대화의 엇갈림으로 침묵을 표현한다. 완벽하게 구성돼 흘러가는 생각, 주고받는 대화엔 침묵이 낄 틈이 없지만 엇갈리는 것들 사이엔 침묵이 있다. 독자들은 그 침묵 속에서 어긋나는 것들의 의미를 파악하며 자기만의 의미로 소설을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포세의 소설은 ‘독해’보다는 ‘묵상’을 필요로 한다.
소설을 ‘묵상’하게 만드는 포세의 주술은 전작 ‘아침 그리고 저녁’(문학동네)을 비롯한 모든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그의 주특기다. 아침 그리고 저녁의 2부는 주인공 요한네스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의 하루를 그린다. 그는 이미 죽은 아내와 절친한 친구를 만나 무의미한 대화와 침묵을 반복한다. 독자들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내는 환각적 분위기를 통해 요한네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의미를 곱씹으며 묵상하게 된다.
어둡고 눈 덮인 숲에 갇힌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아침 그리고 저녁’과 달리 포세는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죽음은 포세 소설의 가장 큰 주제다. 이번 작품에서도 주인공이 숲속에서 존재들을 마주치며 느끼는 환각은 인생을 사는 동안 가지게 된 기억이며 후회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는 죽음 이후에 대해 아주 천천히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는 것으로 보인다.
책에는 포세의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 ‘침묵의 언어’도 함께 실렸다. 평소 포세를 꾸준히 읽지 않은 독자라도 그의 작품 세계 속에 들어가 포세가 내어주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살아온 기억들을 모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장상민 기자 joseph032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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