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의 괴물이 다시 돌아왔다…위성정당 흑역사 반복
국민의힘, ‘의원 꿔주기’ 꼼수 선수쳐…21대 총선의 실패 사례 완벽히 재현
(시사저널=이원석 기자)
"현행 선거제는 4년 전에 잘못 탄생한 괴물이 다시 재림한 거나 다름없다." 여야 정치권 관계자와 정치 전문가들이 현행 준(準)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해 한결같이 내놓은 촌평이다. 우려했던 바가 결국 이번에도 현실로 나타났다. 4년 전의 실패를 겪고도 대한민국 정치는 또다시 '위성정당'이란 괴물 앞에 서있다. 4년이란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그동안 바뀐 것은 전혀 없다. 여당인 국민의힘과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 등 거대 양당은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머뭇하면서도 결국엔 또 각각 국민의미래·더불어민주연합(이하 민주연합)이라는 비례 위성정당을 다시 만들어냈다. 4년 전의 완벽한 재현(再現)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야는 서로 한 석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온갖 꼼수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공천 작업에선 심각한 파열음이 관측되고 있다. 괴물을 만들어낸 저주일까. 여야가 비례 위성정당 공천 작업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현재, 정치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총선 직후 원래 당으로 돌아간 여야 위성정당 의원들
4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21대 총선을 약 4개월여 앞둔 2019년 12월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을 제외한 '4+1 협의체(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비례 투표 정당 득표율에 따라 지역구와 별개로 의석이 배분되는 기존의 병립형 비례제와 달리 연동형 비례제에선 각 정당에 득표율만큼 지역구 선거에서 얻지 못한 의석을 배분한다. 1위만 살아남는 소선거구제에서 지역구 당선자를 내기 어려운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을 용이하도록 하자는 취지를 담은 제도다. 연동형 앞에 '준'자가 붙은 건 득표율의 50%만 채워주도록 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소수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좋은 취지와 달리 충분한 숙의와 협의를 거치지 못한 졸속 법안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당시 선거법 개정에 반대하던 미래통합당은 법의 허점을 이용해 2020년 2월 미래한국당이라는 위성정당을 창당했다. 지역구 당선자를 많이 내는 거대 양당 입장에선 연동형 비례제 아래서 자칫 비례 의석을 거의 얻어가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 개정된 법안은 위성정당을 방지하는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자 민주당도 3월께 기본소득당·시대전환 등 소수정당, 시민사회와 함께 더불어시민당이라는 위성정당을 창당했다. 민주당 공천 탈락자 등 일부 인사가 열린민주당이라는 또 다른 민주당계 정당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치러진 선거에서 미래한국당 19석, 더불어시민당 17석, 정의당 5석, 열린민주당 3석, 안철수 당시 대표(현 국민의힘 의원)가 이끌던 국민의당에 3석의 비례대표 의석이 배분됐다. 그리고 한두 달 만에 미래한국당과 더불어시민당은 모당(母黨)과 합당했다. 열린민주당도 추후 2022년 1월 민주당으로 돌아갔다. 더불어시민당 울타리에 있던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의원과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현 국민의힘 의원)만 독립해 나갔다. 소수정당을 원내에 진입하도록 한다는 취지가 무색하게 결과적으로 거대 정당들의 꼼수로 소수정당들은 오히려 손해를 봤고, 유권자들의 선택권은 침해당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4년 전 총선을 치른 직후, 아니 그 전부터 여야 정치권은 또다시 이 상태로 선거를 치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총선의 선거법 개정 시한(1년 전)이 지나도록 논의는 진전되지 못했고, 급기야 선거가 다가오자 신당들의 출현 및 약진을 우려한 두 거대 정당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몰두해 이전 병립형 선거제로 돌아가는 방안에 공감대를 이뤄가기도 했다. 그러나 '회귀만은 안 된다'는 당내 여론에 부담을 느낀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2월5일 "과거 회귀가 아닌, 준연동제 안에서 승리의 길을 찾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이번 총선 또한 4년 전 그대로의 룰, 여야의 똑같은 행태 속에서 치러지게 된 것이다.
시민사회 추천 4명 중 3명 낙마…민주연합 내부 갈등 증폭
민주당이 지난 총선 때와 마찬가지로 진보진영 내 소수정당(진보당·새진보연합), 시민사회계와 함께 창당한 '통합형 비례 정당'(이 대표 표현) 더불어민주연합은 공천 시작부터 여러 잡음을 내고 있다. 민주연합의 비례 후보는 진보당과 새진보연합이 각각 3명, 시민사회계에서 4명의 후보를 추천해 민주당 추천 후보들과 함께 당선권인 20번 내에 교차 배치하고 그 뒷순번은 나머지 민주당 추천 후보들이 채우기로 했다. 특히 비례 1번은 시민사회계 추천 인사가 들어가기로 했는데, 이 시민사회계 후보 선정 과정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연합에 참여하는 시민사회계 연합정치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는 공개 오디션을 진행해 3월10일 전지예 금융정의연대 운영위원,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 정영이 전국농민회총연맹 구례군농민회장, 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 등 여성 2인, 남성 2인의 후보를 추천했다. 비례 1번에 대한 당초 합의와 여성을 우선 배치해야 하는 원칙에 따라 여성 중 1순위인 전 위원이 민주연합의 비례 1번을 받게 된 것이었는데, 그가 한미 연합훈련 반대 시위 등을 주도해온 반미 단체 '겨레하나' 활동가 출신이라는 점이 후보 선정 직후 알려져 비판이 제기됐다. 국민의힘은 겨레하나가 "반일·반미·종북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왔다"며 "민주당이 종북 세력의 숙주로 완전히 전락해 버렸다"고 비판했다.
비례 1번이란 상징성이 있는 만큼 민주당도 부담을 느꼈는지 바로 다음 날인 3월11일 시민사회계 추천 후보들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며 재추천을 요구했다. 이에 전 위원은 12일 "22대 총선은 반드시 검찰독재 윤석열 정권심판 총선이 돼야 한다. 시민사회의 연합정치 성과가 훼손되지 않길 바란다"며 후보에서 사퇴했고, 이어 또 다른 여성 후보인 정영이 회장도 "여당의 치졸한 정치 공세에 종북 몰이의 빌미로 쓰여 윤석열 정권의 폭정을 감추는 핑곗거리가 되느니 여기서 도전을 멈추고자 한다"며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일단 시민사회는 전 위원과 정 회장 대신 여성 1번에 서미화 전 국가인권위 비상임위원을, 2번에 민변 사무차장을 지낸 이주희 변호사를 새롭게 추천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남성 2순위로 추천된 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 역시도 '병역 기피'를 이유로 컷오프 통보하면서 민주연합 내부에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임 전 소장은 3월13일 이 같은 사실을 알리며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한 사실을 병역 기피라 규정한 것"이라며 반발했고, 시민사회의 후보 추천 상임심사위원이 사퇴하는 등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선 시민사회 후보 추천 심사위원 구성 자체가 편향적 인사들 위주로 돼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 내에선 비례 1번에 대한 순번 재검토 이야기도 나오는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도 192명 비례 후보 신청자 중 1그룹(당선권 20번 내), 2그룹(20번 밖)으로 각각 10명씩 총 20명을 선별해 명단을 민주연합 측에 넘겼다. 여성 인사로는 백승아 민주연합 공동대표(전 강원교사노조 위원장), 오세희 전 소상공인연합회 회장, 강유정 강남대 교수, 임미애 경북도당위원장, 고재순 전 노무현재단 사무총장이, 남성 인사로는 위성락 전 주러시아대사와 임광현 전 국세청 차장, 박홍배 한국노총 금융노조위원장, 정을호 전 민주당 총무국장, 김준환 전 국정원 차장 등이 당선권으로 평가받는 1그룹에 배치됐다. 곽은미 민주당 국제국 국장과 백혜숙 에코십일 대표이사, 조원희 민주당 경북도당 농어민위원장, 코미디언 서승만씨 등이 2그룹으로 추천됐다.
野 내부 "후보 검증 제대로 못 하면 큰 낭패" 우려
민주당 후보 추천 과정에선 청각장애인 크리에이터 박은수씨가 민주당 비례대표 추천관리위로부터 여성·장애인·청년 몫으로 당선권 내 추천 명단에 올랐다고 최종 통보를 받았으나 최고위에서 뒤집혔다고 밝히면서 일부 논란이 일고 있다. 박씨는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추천위로부터 통보를 받았다가 번복됐음에도 명확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소명의 기회조차 없었다"며 "제가 빠지고 최종 추천 명단에 다른 장애인 후보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진보당에선 장진숙 공동대표가 비례대표 후보 순번 1번, 전종덕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이 2번, 손솔 수석대변인이 3번으로 민주연합에 추천됐다. 새진보연합에선 지난 총선에서도 더불어시민당 비례 5번을 받아 당선됐던 용혜인 의원(상임대표)을 비롯해 한창민 사회민주당 공동대표, 최혁진 전 문재인 정부 청와대 사회경제비서관이 추천돼 당선권에 배치되게 됐다. 국민의힘은 진보당이 과거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이후 창당된 민중당의 후신이니만큼 의회에 진입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색깔 공세를 강화하고 나섰다. 일부 후보의 '반미·친북' 성향 논란과 민주연합 내부 갈등, 민주당의 공천 파동 영향 탓에 민주연합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당초 당선 안정권으로 여겨졌던 20번이 위협받을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민주연합을 대신해 야권에서 조국혁신당이 급부상하면서 진보진영 지지층 사이에서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혁신당)'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있다.
민주당 내부적으로도 비례 위성정당 후보 선정 등과 관련해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나온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지난 총선 때도 위성정당 후보들이 당선 이후에 문제가 많았다. 다른 세력과 함께하게 되면서 검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선거에서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며 "다른 세력도 존중해야 하지만 표를 가져오기 위해선 전반적으로 더 국민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른 당내 인사도 "민주당 추천 인사가 발표됐지만 별로 이슈가 되지 않고 있다"며 "더 참신하고 존재감 있는 인사, 혹은 스토리나 메시지가 있는 인사들을 발탁해야 하는데, 그게 부족하지 않았냐는 아쉬움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與, 주류들 비례 몰리자 "한동훈 공천 문제점 노출" 지적도
국민의힘은 비례 후보에 총 530명이 신청했다고 알렸다. 중간에 신청 접수 기간을 이틀 연장하기도 했지만, 직전 총선 미래한국당 때의 531명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530명 중 부적격자 3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497명에 대해 면접 등 선별 작업을 거치고 있다. 국민의미래 비례 신청 명단에는 전·현 당 지도부 인사들 이름이 눈에 띄었다. 국민의미래 선대위원장으로 거론되는 인요한 전 혁신위원장도 여당 지도부의 요청에 후보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외에 인 전 위원장과 함께 혁신위 활동을 했던 정선화 전 동국대 WISE캠퍼스 보건의료정보학과 겸임교수, 이소희 변호사, 김기현 지도부 출신의 김가람 전 최고위원, 현 지도부의 한지아·윤도현 비대위원이 공천을 신청했다. 현 정부 대통령실 출신 인사들도 공천 서류를 넣었다. 안상훈 전 사회수석과 천효정 전 부대변인, 최단비·성은경 전 행정관 등이다.
사격 금메달리스트 진종오 전 2024강원동계청소년올림픽 조직위원장, 박충권 현대제철 연구개발본부 책임연구원, 이레나 이화여대 의대 교수, 김건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 여당의 총선용 영입인재들도 비례대표에 도전장을 냈다. 여권 일각에선 지도부 출신, 영입인재 등 주류들이 대거 비례에 몰린 것을 두고 한동훈 비대위의 하향식 공천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지도부나 대통령실 출신, 영입인재들은 이름이 알려질 기회들을 가졌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사람들인데 이들은 비례보다는 지역구에 많이 투입돼야 하지 않겠나"라며 "당이 공천을 지나치게 톱다운(top down) 방식으로 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뚜껑을 열어봐야겠지만, 대중성 없이 지도부의 생각만으로 비례 후보를 구성하면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지도 있는 인사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비판을 우려한 것이다.
비례 공천 신청자 명단에선 일부 논란이 있는 인사들도 포착됐다. 지난해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지명됐으나 낙마한 김행 전 비대위원은 신청자 명단엔 공개되지 않았으나 공천 신청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입인재로 '친족 강간 사건 수임' 논란을 빚었던 공지연 변호사도 신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의힘은 3월13일 당 윤리위원회를 열고 국민의미래로 당적을 옮길 비례대표 의원 8명의 출당 안건을 의결했다. 위성정당에 '의원 꿔주기'다. 현역 의원 수는 기호를 정하는 기준이 되는데 지역구 투표에서 기호 2번인 국민의힘은 비례 투표에서도 두 번째 칸인 기호 4번(비례 후보 안 내는 민주당, 국민의힘 제외)을 노리고 있다. 현역 의원 숫자는 정당 득표율 등과 함께 국고보조금 액수에 영향을 미친다. 지난 총선에서 더불어시민당은 34억2900만원, 미래한국당은 86억2900만원의 보조금을 받았다. 그 돈은 합당을 통해 그대로 모당의 금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치권에선 선거법 개정과 별개로 최초에 위성정당 창당을 실행한 국민의힘이 이번 총선에서도 대놓고 꼼수를 쓰면서 부끄럼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2월23일 국민의미래 중앙당 창당대회에서 "'국민의 미래'는 국민의힘이 지향하는 바이다. 사실상 다른 말이 아니다"라며 "제가 앞장서서 국민의미래 선거운동과 승리의 길에 함께하겠다"고 노골적으로 국민의미래의 위성정당적 성격을 인정했다. 물론 국민의힘이 움직인 만큼 민주당도 똑같이 추후 의원 꿔주기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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