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 대사’ 이종섭, 땅에 떨어진 ‘군인의 명예’
“호주 대사 웬 말이냐 도주 대사 구속하라, 구속하라, 구속하라!”
지난 13일(현지시각) 호주 동포들이 캔버라의 주오스트레일리아(호주) 한국대사관 앞에서 외친 구호다. 이들은 해병대 채아무개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 피의자인데도 호주 대사에 임명된 이종섭 대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종섭 대사는 2022년 5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윤석열 정부 첫 국방장관이었다. 그가 장관으로 있을 때 육군사관학교(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과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논란이 불거졌다. 일어난 일들만 놓고 보면 이 대사가 독선적이고 좌충우돌하는 ‘트러블 메이커’(사고뭉치)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대사에 대한 군 내부 평가를 들어보면, 신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평이 많다. 그는 1980년 육사 40기로 입교해, 1984년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2019년 별 셋인 중장으로 전역할 때까지 35년간 군복을 입었다.
윤 대통령은 대선 기간 동안 “북한은 주적”, “북한 선제타격” 같은 거친 말을 쏟아냈기에 대북 강경파인 예비역 장성 중에 국방장관을 지명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2022년 4월 윤석열 정부가 이 대사를 첫 국방장관으로 지명하자 문재인 정부 인사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앞뒤 꽉 막힌 막무가내 인사가 아니라 다행”이란 반응이 나왔다. 이 대사가 문재인 정부 임기 때 제7군단장, 합동참모차장으로 2년가량 근무해, 문재인 정부에게도 그에 대한 인사 정보가 있었다.
이 대사는 일선 부대 지휘관으로 근무한 야전형 군인이 아니라 정책통 군인이었다. 그는 35년 군 생활 중 미국 유학 6년, 국방부 6년, 합참 2년, 이명박 청와대 2년9개월 등 약 절반(17년)을 정책 부서와 대학에서 한미동맹 등 안보정책을 다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군인보다는 학자나 고위 관료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는 남의 말을 경청하고 신중하게 판단하는 스타일이다. 가령 국방장관 재직 때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오면, 예상 질문을 뽑아 답변을 미리 준비하고 참모들과 러허설을 마친 뒤 인터뷰에 나섰다. 이와 달리 적극적이고 언변이 뛰어난 신원식 국방장관은 특별한 준비 없이 평소 주장대로 언론 인터뷰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꼼꼼하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던 이 대사가 지난해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때 보인 모습은 평소와 너무 달랐다.
지난해 7월30일. 박정훈 당시 해병대 수사단장은 채 상병 사건 처리계획을 당시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이때 이종섭 장관은 배석한 국방부 참모들의 의견을 두루 들은 뒤 보고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다음날 이를 돌연 취소했다. 결재 취소를 두고 논란이 일자 그는 “당시 확신을 가지고 결재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21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 답변). 수사에 대한 외압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국방장관이 스스로 ‘바보 인증’을 하고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허문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지난해 10월 국방장관에서 물러나는 날 언론 인터뷰를 통해 채 상병 사건과 관련해 “진실이 왜곡되고 있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진상이 민간수사기관과 법원에 의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고 근거 없이 제기됐던 모든 의혹이 해소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의혹이 해소되기는커녕 그가 갑자기 호주 대사에 임명되면서 의혹은 더욱 커졌다.
급기야 ‘도주 대사’로 불리며 명예마저 땅에 떨어졌다. 35년 군 생활을 한 그에게 명예는 생명같이 무거운 가치다. 명예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예비역 해군 소장인 김진형 제독은 ‘대한민국 군대를 말한다’란 책에서 “미국 장교들에게 ‘명예 (honor)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마치 하나 된 것처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올바르게 행하는 것’(Do the right thing even if no one is watching)이라고 힘주어 말한다”고 설명했다. 양심에 비춰 당당하게 행동하고, 스스로 부여하는 도덕적 가치가 명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 대사가 심리학의 ‘주둔군 이론’을 떠올려봤으면 한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인생에서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는 반드시 그곳에 심리적 주둔군을 많이 남겨 두게 되고,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위로를 받는다”고 ‘주둔군 이론’을 설명한다. 35년 군 생활을 한 이 대사에게 ‘심리적 주둔군’은 20대 초반 4년을 보낸 육사 생활일 것이다.
육사의 모토는 ‘화랑대에서 동작동까지’다. 화랑대는 육사를, 동작동은 국립서울현충원을 뜻한다. ‘화랑대에서 동작동까지’는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에 충성하고 명예롭게 죽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육사 생도는 하루도 빠짐없이 ‘사관생도 신조’를 외친다. “하나,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 둘, 우리는 언제나 명예와 신의 속에 산다. 셋,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이 대사가 육사 생도 시절을 돌이켜보며, 신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길 기대한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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