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는 책, 먹는 책, 권총 책… 펼치면 상상 이상[북리뷰]

박동미 기자 2024. 3. 15. 09:3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이상한 책들의 도서관
에드워드 브룩-히칭 지음│최세희 옮김│갈라파고스
슬라이스 치즈로 만든 페이지
책갈피 당기면 발사되는 권총
사람 키 훌쩍 넘는 거대 서적
피부 가죽으로 표지 만들기도
저자가 모은 貴書, 저마다 사연
정보전달 매체 이상 가치 담겨
1800년대 독일 재봉사 아그네스 리히터의 자수 리넨 재킷. 26년간 정신병동에 있었던 그는 옷 조각에 자신의 이야기를 남겼다. 갈라파고스 제공

여전히 가장 신뢰받는 지식·정보 전달 매체. 책은 그 자체로 위대하고, 또 인류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빠르고 편리한 영상이 대세인 이 시대에도, 책을 읽든 읽지 않든, 사람들은 책을 ‘지지’한다. 다만 전제가 있다. 수천 년을 살아남고도 여전히 그 가치를 빛내는, 역사의 승인을 받는 ‘좋은’ 기록에 한하여 그렇다는 것. 우리를 엄숙하고 진지하게 만드는 건 대부분 정전(正傳)이다. 고서 판매상 부모 밑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박물관과 같은 집에서 살고, 정신을 차려보니 희귀 서적 수집가가 돼 버린 저자는 그런 것-우리가 정전이라 부르는 것-은 “무한한 책의 바다에서 단 몇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다’를 메우는 건 기록의 역사 뒤편에 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해 연구도 회자도 증쇄도 없이, 금기와 규범을 어겨 책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추방된 책들. 저자는 그 기이하고 저속하며 발칙한 책들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 세계는 선택받지 못한 대신 마음껏 자유롭다. 책은 그곳에서 우리가 더 너른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상상력의 비법을 획득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책이 구현할 수 있는 세계를 다시 정의한다. 우리가 책을 사랑하는 방식을 고유한 언어로 다시 쓰면서 감각을 확장한다.”

얼마나 ‘이상한’ 책들이길래. ‘해리 포터’에 나오는 마법 책이라도 있나 싶은데, 책을 펼치면, 순간 정말 그렇다! 저자가 수집한 책들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모양새다. 먹거나 입을 수 있는 책, 사람의 피와 살로 만들어진 책, 악마를 소환하는 책, 너무 길어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책, 너무 커서 한 페이지를 넘기는 데 모터를 동원해야 하는 책, 너무 작아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책, 급할 때 변기가 되는 책, 살상을 저지르는 책, 그리고 사람의 목숨을 구한 책….

15세기 제작된 기도서 형태의 권총.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책 ‘클렝커 아틀라스’.
호두 껍데기 속 19세기 토머스 제퍼슨 전기.

저자가 수집한 남다른 사연이 깃든 책들은 물론, 난생처음 보는 형태와 크기, 독특한 용도의 책들의 사진이 빼곡하다. 주제에 따라 10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순서에 상관없이 그저 끌리는 대로 돌아다니면 된다. 도서관을 오래 휘저을수록, 책의 매력과 힘에 대한 믿음은 더욱 커질 테니. 단적으로 사람 살린 책을 보라. 1차 대전 당시 한 프랑스군의 가슴 주머니에서 총알을 막아낸 포켓판 ‘킴’은, 군인의 가슴과 총알 사이 간격(삶과 죽음의 간격이다)이 겨우 20페이지라는 경이로운 사실을 전한다. 네덜란드 학자가 만들어 영국 찰스 2세에게 선물한 너비 2.4m, 높이 1.76m의 책 ‘클렝커 아틀라스’. 이 거대한 책은 펼치는 것만으로도 독자를 하찮게 만든다. 1750년 프랑스에선 여행을 자주 다니는 애서가를 위한 ‘변기 책’도 만들었다. 표지엔 ‘저지대 국가의 역사’라고 새겨져 있고, 가죽 장정본을 펼치면 휴대용 변기가 완성된다.

‘무서운’ 책들의 정교함은 오싹하다. 1600년 비밀 독약 수납장으로 사용된 책은 속이 비어 있고 작은 서랍마다 갖가지 독초의 이름이 표시돼 있다. 또 15세기 이탈리아의 한 공작은 권총을 품은 기도서를 지니고 다녔다. 책갈피처럼 보이는 방아쇠가 비단 실로 감싸져 있고, 책을 덮어야만 발사되도록 설계됐다. 제목부터 ‘웃기는’ 책들은 어떤가. 기분이 울적하다면 맨 뒷장부터 읽어라. ‘오이에서 태양광선을 추출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과정은 따분하다’거나 ‘네가 총을 쏘면 : 네 총은 뜨겁고 범인 총은 뜨겁지 않다. 이제 어떻게 할까?’ ‘자전거 타는 법 : 안장에 걸터앉은 다음 두 발을 저어 달려가라’ 등.

책의 소재가 기괴한 사례도 많다. 그리 먼 옛날 일도 아니다. 2000년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피 27ℓ를 사용해 605쪽의 코란을 썼다. 또 뉴욕 출판인 벤 덴저가 발간한 ‘미국 치즈 20장’은 무얼 말하나. 노란색 헝겊으로 감싼 표지와 개별 포장한 미국산 슬라이스 치즈 20장. 책은 그 구성만큼이나 ‘쓸데없는’ 질문을 만들어낸다. ‘이런 책을 펴낸 건 도대체 어떤 인간이지?’ 하고. 또 망자를 위한 기도문이 빼곡히 새겨진 17세기의 해골도 저자의 ‘이상한 책’ 목록에 포함된다.

‘이상한’ 책들을 창조해낸 ‘지은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저자는 세상의 온갖 희귀한 책들을 수소문해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자신의 행위를 이렇게 정의한다. “괴짜들, 기인들,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사회 부적응자들, 다시 말해 잊힌 자들을 불러 모아 기린다”고. 그들로 인해 인류가 망각할 뻔한 사유와 지식, 유머가 여전히 살아 숨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기상천외한 책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장할 가치가 충분하다. 가장 큰 미덕은 책에 대한 통념과 기준을 마구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읽는 행위의 의미와 무의미, 또 그 유익함과 해로움의 경계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촘촘한 설명도 지루하지 않은 재치 있는 표현, 매끄럽고 속도감 있는 문장들, 시종일관 유쾌한 글쓴이의 태도가 잘 드러나는 책은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 “정말 멋진 책”이라는 각종 해외 매체들의 ‘호들갑’스러운 평도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책이라면 심장부터 뛰는 애서가들은 물론, 책이 무겁고 갑갑하다고 여겨 온 이들도 ‘책의 의미’와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뭐 이런 책이 다 있어가 아니라 세상에 이런 책이!라고 외칠 때 우린 조금 더 호기로워진다. 이런 책들이 있었고, 살아남았고, 누군가 지킨다. 내 취향과 사유, 마음의 지평을 의심하지 말고, 무한 확장해 보도록.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그때 우린 조금 더 진실하다. 296쪽, 3만3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