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 눈물은 잊었다…파리에선 날아 오르리
“하얀 콘크리트 바닥을 보면서 머리도 같이 하얘졌어요. 백지상태에서 그냥 들어가서 탔죠.”
2019년 5월. 중국 상하이 리버사이드 쉽야드 파크에 선 12살 조현주는 입을 벌린 채 경기장을 초점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최연소 스케이트보드 국가대표’ 타이틀을 달고 나선 첫 국제대회였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선수들이 움푹 파인 사발 모양 안에 놓인 여러 구조물을 자유자재로 타며 보드와 한 몸이 돼 날아올랐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나 보던 파크를 실제로 보니 훨씬 더 크고 웅장하더라고요.” 공원에 설치된 나무 바닥에서 연습해 온 그가 국제 대회 수준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큰일 났다. 집 팔아야겠다.’
딸의 흔들리는 눈빛을 읽은 아버지 조병무씨는 덜컥 겁이 났다. 공원에서 오빠들과 웃으며 타던 실력으로 딸이 세상과 경쟁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뭣보다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기 위해선 스케이트보드 문화가 정착된 미국·일본 등 국외 전지훈련이 필요했다. “에스케이텔레콤(SKT)이나 여러 곳에서 훈련비를 지원하면서 집은 팔지 않게 됐네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매니저인 조씨지만, 한때는 어린이날 선물로 딸에게 스케이트보드를 사다 준 자신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의 걱정과 달리, 스케이트보드를 향한 조현주의 뚝심은 세계 무대에서도 통하기 시작했다. 2019년 싱가포르 반스 파크 시리즈 아시아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냈고, 2022년 세계선수권대회 파크 종목(사발 모양 경기장 내 여러 슬로프를 타며 45초간 연기를 펼치는 종목)에서 26위에 올랐다. 작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순위를 15위까지 끌어올렸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공부와 보드의 갈림길에 섰어요. 아빠가 제게 선택하라며 다그칠 때도 저는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어요. 울면서도 (보드를) 타겠다고 말했던 거로 기억해요.” 그는 두 달 전 미국 전지훈련 도중 넘어져 오른쪽 아래 팔뼈가 모두 부러지는 사고를 겪었음에도 “부상에서 오는 두려움은 없다”며 미소 지었다.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은 스케이트보드 간판스타로 존재감을 드러낸 대회였지만, “가장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은 대회”이기도 하다. 조현주는 여자 파크 결승에서 3위(78.97점)를 지켜오다 마지막 주자 중국의 마오 지아시가 80.46점을 달성하면서 포디움 진출이 좌절됐다. “전광판에 한국 국기가 떠 있다가 갑자기 (중국 국기로) 바뀌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오면서 막을 수 없었어요. 선수 대기실에서 휴대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바꿔놓고 30분 내내 울었던 기억이 나요.”
4위라는 대한민국 역대 최고 성적을 냈지만, “응원해 준 국민들의 기대에 메달로 부응하지 못했다는 죄송함”이 앞섰다. 항상 매의 눈으로 칭찬에 인색했던 아버지는 “메달을 따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줬다”며 딸을 다독였다.
인터뷰 당일(7일) 오른팔 깁스를 푼 조현주는 곧바로 보호대를 착용한 채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5월16일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파리올림픽 예선전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로 올림픽 스케이트보드 종목 출전을 노리고 있다. 목표는 항저우 대회에서 이루지 못한 포디움 진출이다. “지금껏 해 온 것처럼 준비한 기술을 후회 없이 다 소화하고 잘 타고 나올 수 있으면 돼요.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은 대회가 아직 없는데, 그게 파리올림픽이 됐으면 좋겠어요.” 예선전이 남아있지만,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다만, 지난 대회와 같은 부담감은 조금 내려놨다. 과거처럼 대회에서 몇 위안에 들어야겠다는 욕심을 부리기보단, 준비한 연기와 구성을 잘 마치면 순위와 점수는 따라온다는 것을 이제는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초등학생 시절 공원에서 나이·성별 상관없이 함께 어울리며 보드를 탔던 시절을 자주 떠올린다. “원래 보드를 그렇게 시작했으니까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온 조현주가 파리행 티켓을 위한 힘찬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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