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제언] “한국 의료체계 특수성 먼저 돌아보라”
[의대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의-정, 국민이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입을 위험이 커지고 있습니다. 대치 국면을 풀고 파국을 막을, 보건 의료계 인사들의 긴급 제언을 집중 연재합니다.]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은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국가가 철저히 관리하는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 저렴한 의료비, 제한 없는 의료 접근성, 그리고 남성의 국방 의무와 긴 복무 기간 등이 그 예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상대적으로 노동력이 많이 요구되고 생명과 직결되는 전문과목 전공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국 의료 체계를 다른 나라들과 구별 짓는 중요한 요소이며, 의료 전문인력 양성과 배치에 있어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최근 정부의 의대 입학정원 증원 정책을 둘러싼 논란은 한국 의료계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현재 3050명 수준인 의대 입학정원을 5000명 이상으로 대폭 확대하려는 정부 계획에 많은 의사단체, 의대 교수, 전문의, 전공의, 그리고 의대생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유급과 의사 면허 정지, 업무 개시 명령 등의 강압적인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으나, 이는 양측 간 대치 상황만 더욱 극단적으로 만들 뿐이다.
정부에서는 연일 필수의료패키지 등의 지원책을 내세우며 정원 증원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필수의료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단지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 제7조에 명시된 공공보건의료기관의 막연한 의무사항만을 근거로 들 뿐이다.
"의대 정원 늘리는 것만으론 의료계 위기 극복 불가능"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에는 여러 구조적 문제들이 존재한다. 의료전달체계의 미비, 상급 의료기관의 수가 차등 부족, 요양병원 병상의 과잉공급, 환자의 수도권 쏠림 현상과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제도의 부재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의료비 사용의 효율성과 합리성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의료 재정의 누수 또한 심각한 상황이다. 의료서비스와 사회서비스 간 경계가 모호해 의료기관에서 제공하는 필수적인 사회적 서비스에 대한 인력과 행위는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한의사 제도로 인해 우수한 인재가 기간 의료에 충분히 이바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료비 낭비의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현재 700명이 넘는 한의대 입학정원을 줄이거나 폐지하고, 교육과정을 의대 수준으로 대폭 개편해 졸업 후 일정 기간의 인턴 과정을 거쳐 전문의 수련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은 채 단순히 의대 입학정원만 늘리는 것으로는 한국 의료계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오히려 이는 의대 교육 여건과 질적 수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 없이 섣불리 추진된 정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현재 의대에서는 26개 임상 전문과목과 10개 내외의 기초의학 교실을 운영 중이며, 학생들은 이 방대한 분량의 교과를 모두 습득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원을 급격히 늘리는 것은 의학교육의 질을 심각하게 저해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변호사 수의 증가나 일반대학 교수 1인당 학생 수와 비교하며 의대 정원 확대를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의학교육의 특수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한 발상에 불과하다.
"의사는 성직자가 아니다...그들도 직업인이자 생활인"
이번 증원 정책으로 인해 고등학교와 학원가에 의대 입학 열풍이 불고 있다. 향후 의대 교육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교육의 난맥상과 자연과학, 첨단산업 인재양성의 황폐화로 이어질 것이 자명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의료계 내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의사를 '성직자'와 같은 존재이길 바라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의사 역시 환자를 위해 일하는 직업인이자 보편적인 경제 주체이며 생활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많은 부모가 자녀의 의대 입학을 자랑스러워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군 복무 3년을 포함해 14년의 교육 기간이 지난 후에야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일반대학을 나온 다른 아이들이 사회생활 8, 9년 차가 되는 시점과 비교해 본다면 그 격차와 부담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의대 교수들은 의사이기 이전에 교육자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연구와 논문 작성, 학생 교육, 임상 실습 지도, 환자 진료, 각종 행정 업무 등 감당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다. 게다가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일반대학보다 월등히 많은 연구 업적을 쌓아야 하며 그 기준 또한 매우 엄격하다.
무엇보다 의대 교수로서의 존재 가치는 부단한 학습과 연구를 통해 역량을 높이고 학생과 전공의를 잘 가르치는 데 있다. 가르칠 대상이 사라진다면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그저 환자를 보는 의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최근의 상황이 의대 교수들의 교육자적 소명의식과 가치를 퇴색시킬까 우려된다.
지금 한국 의료계는 커다란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정부는 한국 의료계의 특수성과 내재한 문제들을 깊이 살피지 않은 채 섣부른 정원 증원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는 결코 지속 가능한 해법이 될 수 없다.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 의료 체계의 미래상을 그려보고, 의료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회 각계의 지혜를 모아 신중하게 접근해 나가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눈앞의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한국 의료의 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때이다.
고현윤 부산대 의대 명예교수(파크사이드재활의학병원 명예원장)
에디터 코메디닷컴 (kormedimd@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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