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는 명품백 대신 문화를 과시한다, ‘야망계급론’[책과 삶]

이혜인 기자 2024. 3.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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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개봉한 찰리 채플린의 영화 ‘유한계급’(The idle class)는 상류 계급을 비꼬는 내용을 담은 영화다.

야망계급론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지음 | 유강은 옮김 | 오월의봄 | 400쪽 | 2만2000원

맛있는 밀크티를 만들려면 우유를 먼저 따라야 할까, 아니면 뜨거운 홍차를 먼저 따라야 할까. 스푼으로 한 번 섞으면 어차피 똑같은 밀크티 맛이 될 것 같은데, 놀랍게도 이 질문을 두고 1900년대 초반 영국에서 꽤나 진지한 논쟁이 있었다. 192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한 티파티에서는 다양한 사람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4잔에는 우유 먼저, 4잔에는 홍차를 먼저 따른 밀크티를 내놓기도 했다. 이 논쟁의 본질에는 ‘계급’이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찻잔은 내구성이 약해 뜨거운 차를 먼저 부을 경우 금이 가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돈 많은 사람들은 뜨거운 차를 곧바로 부어도 되는 고급 자기를 살 수 있었다. 뜨거운 차를 먼저 부어서 밀크티를 만드는 것은 높은 경제적 지위를 보여주는 표지로, 일종의 과시적 행위였다.

소스타인 베블런(1857~1929)은 이 같은 물질적 재화와 지위의 관계를 포착한 미국의 사회학자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데 특정한 재화를 사용한다는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쓸모없고 기능적이지 않은 품목들인 물질적 재화를 통해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헛되이, 끊임없이 과시하는 부유하고 게으른 사회 상층계급을 ‘유한계급’(leisure class)이라 칭하고 맹렬히 비판했다. 그의 주장으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은 외제차나 명품을 사는 과시적 소비로 구분짓기를 시도한다.

책 <야망계급론>은 베블런의 유한계급에서 한 차례 더 나아간 ‘야망계급’(Aspirational Class)을 말한다. 저자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도시·지역계획학과 공공정책학을 연구하는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이다. 그는 베블런이 활동하던 시대 이후 산업혁명이 이뤄지고 제조업이 발전하면서 물질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성이 높아졌다고 설명한다. 이제 사치품은 더 이상 부유층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으며, ‘과시적 소비의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자신들을 새롭게 구분짓기하는 상층계급인 야망계급이 출현했다. 야망계급은 소득수준이 아니라 문화적 관습과 사회규범으로 하나로 묶인다. 저자는 야망계급이 지식과 문화자본을 활용해 “더 미묘한 지위 표시”를 하고 있으며, “점점 더 비과시적으로 달라지는 선택이 자신과 자녀들의 사회적·문화적 (그리고 종종 경제적인) 특권을 강화하면서 나머지 모두를 배제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책은 야망계급의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 과시적 소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부터 살핀다. 저자는 미국 노동통계국의 소비자지출조사(CES) 데이터를 분석했다. 인종·교육수준·성별·소득수준 등 사회경제적 특징에 따라 소비 습관을 들여다봤는데, 과시적 소비와 비과시적 소비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눠 변화를 살폈다. 과시적 소비는 의복·시계·보석·자동차 등 사치품에 대한 지출, 비과시적 소비는 교육·의료·연금·육아 등 노동집약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지출이다.

부유층과 상층 중간계급(소득 상위 1%, 5%, 10% 내 계층)은 과시적 소비에 여전히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지만, 전체 소비에서 비과시적 소비를 점점 늘려가고 있다는 점이 포착된다. 소득뿐 아니라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비과시적 재화에 더 많은 지출을 했다. 석사학위 소지자는 고등학교 중퇴자보다 100%, 학사학위 소지자는 약 15% 더 많았다. 저자는 “비과시적 소비는 엘리트 집단이 수행하는 가장 일관된 구별짓기 소비 실천이며, 이를 통해 그들은 다른 모든 이들과 정말로 구별된다”고 지적한다.

부유층과 엘리트들은 덜 알려지고 암호화된 상징들을 찾아내 과시하며 계급 구분짓기를 시도한다. 그림·경향신문 DB

영국 전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의 발언은 비과시적 소비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대학교를 나왔으며, 여왕의 먼 친척이다. 캐머런은 국무조정실장 프랜시스 모드가 자신을 포함한 동료 엘리트 친구들과 함께 주방에서 간단하게 먹는 저녁 식사를 뜻하는 ‘키친 서퍼’를 즐긴다고 밝혔다가 ‘가디언’ 등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키친 서퍼는 오늘날 엘리트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주방과 분리된 좋은 다이닝룸이 있음에도 더 무심하고 친밀한 분위기를 선호해 주방에 서서 밥을 먹는 라이프스타일을 의미한다. 부유층과 엘리트들은 수많은 물질적 소비재의 접근성이 낮아지고 소비가 공공연해진 탓에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기 위해 덜 알려지고 암호화된 상징들을 찾아내고 사용한다. 저자는 거의 모든 비과시적 소비의 핵심은 아는 사람만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비가시적이며, 암묵적 정보나 상당한 돈이 없이는 모방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야망계급은 ‘과시적 생산’이라는 삶의 한 행태로도 자신들을 드러낸다. 저자는 야망계급이 은수저나 비싼 찻잔을 사는 대신 교육과 건강, 은퇴, 양육에 쏟는 투자를 통해 어떤 물질적 재화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계급을 구분짓고 나아가 계급 재생산을 보장한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미국 내 고학력 집단에서 모유 수유가 필수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상을 통해 이 과시적 생산을 설명한다. 미국에서는 대학 졸업 이상 학력을 가진 여성들의 95%가 일단 모유 수유를 시작하는데, 고등학교 졸업 이상을 대상으로 하면 그 비율이 83%로 떨어진다.

고소득·고학력 여성들이 모유 수유와 모성을 중시하는 문화는 20세기 초와는 사뭇 다른 현대적 유행이다. 원래 20세기 초 잉글랜드와 미국의 상류사회 여성들 사이에서는 인공적이고 현대적으로 만든 분유가 더 과학적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가정분만, 애착육아, 친환경 육아용품·식품 고집 등은 새로이 생긴 기조다. 저자는 “상층 중간계급 모성의 사회적 실천”이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대다수 가정의 평범한 관계와 일상생활에서는 보기 힘든 문화자본과 상징자본,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자유시간에 의존한다”는 점을 짚는다. “상층 중간계급 부모들은 이런 양육행위에 참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과시적 육아를 드러내고 따라서 자신과 자녀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물질적 수단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야망계급들은 도시에 모여 산다. ‘소비의 풍경’이 된 21세기 도시는 야망계급의 다양한 구별짓기 소비 실천이 펼쳐지는 곳이다. 저자는 도시는 하나의 소비 공동체로, “한 도시의 성공을 좌우하는 요인은 거주자들이 얼마나 다양한 소비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가에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생각과 문화,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어” 하며, “이런 현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국 고도로 계층화된, 교육수준이 대단히 높은 부유층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도시에는 훨씬 더 많은 엘리트들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일상적인 삶의 과시요소들을 통해 자신들의 위치를 강화한다. 저자는 도시인이 “다른 엘리트들 사이에 어울려 사는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 유토피아와 근처에 있는 교외 사이에 존재하는 심각한 불평등을 무시할 수 있다”고 꼬집는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야망계급은 단순한 과시적 소비 대신 과시적 생산, 비과시적 소비 등을 함으로써 과거 유한계급의 물질적 재화 소비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심각하게 계급 격차를 확대하고 있다. 은수저를 사거나 명품백, 자동차를 사는 것은 어떤 계급이든 흉내라도 낼 수 있다. 하지만 교육비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의료비·연금에 꾸준히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자식의 문화자본을 채워주기 위해 우아한 여가생활을 계획하는 것은 쉽게 흉내낼 수 없다. 저자는 “(야망계급이) 중간계급이라면 시도할 수 없는, 따라서 이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부와 상향 이동성을 재생산한다”는 점을 짚는다.

책은 “소비는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우리의 소비 습관은 겉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대상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복잡한 무언가를 보여준다.” 새로운 유행처럼 보이는 것들 속에 계급 구분짓기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돼 있다.

책 ‘야망계급론’. 오월의봄 제공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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