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1호선 연장 연천역 걷기길] 역 나오면 망곡산둘레길…개성보다 북쪽에 위치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뒤 찾아온 정적처럼 길은 고요했다. 이따금 스산하다고 여겨질 무렵이면 저 머나먼 산골짜기에서 들려온 소총수들의 총성이 닫힌 귀를 열어젖힌다. 처음엔 마뜩찮았던 그 소리도 금방 익숙해지니 어색한 자리를 환기하려 애써 내뱉는 헛기침같이 그저 인기척인 것만 같다.
리기다소나무, 토종소나무, 잣나무, 자작나무가 늘씬하게 뻗은 매력적인 오솔길은 빨리 봄이 와달라고 보채는 듯하다. 그야 그럴 만도 하다. 이곳은 진달래와 벚꽃 명소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번 봄은 조금 더 특별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걸을 수 있도록 등산로를 싹 뜯어 고쳤다. 미리 망곡산둘레길과 군자산둘레길을 엮어 걸어보았다.
새 단장한 망곡산둘레길
연천역이 수도권 1호선의 새로운 종착지가 됐다. 연천역에서 꼬박 하루 알찬 도보여행을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보통이라면 걷기길을 걷고 주변 명승까지 함께 탐방하는 건 '뚜벅이'들에게 무리겠지만 연천역에선 이것이 가능하다. 연천역에서 출발하는 시티투어버스가 있기 때문. 그래서 반나절은 걷기길을 걷고, 반나절은 시티투어버스(관광팁 기사 참고)를 이용해 여행하면 된다.
시티투어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따라 가면 되는 것이라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 어느 길을 걸을지는 선택에 어려움이 따랐다. 먼저 연천역에서 바로 이어지는 길은 두 가닥이 보인다. 하나는 연천의 진산인 군자산과 망곡산을 엮어 걷는 둘레길, 그리고 기찻길과 나란히 흐르는 차탄천을 따라 걸으며 주상절리를 볼 수 있는 차탄천 에움길이다. 연천역에서 마을을 가로질러 양금산을 오르는 것도 매력적으로 보인다. 연천군 관광과에 전화를 걸어 세 가지 후보 중 추천해 달라고 하니 싱겁게도 답은 금방 나왔다.
"차탄천 에움길은 현재 유실된 상태입니다. 길을 자주 정비해 주곤 했는데 하천 범람으로 인해 자꾸 길이 끊겨서 정비를 유보하고 홍보도 안 하는 상태예요. 또 양금산은 과거 군부대가 주둔하고 사격연습도 했던 곳이라 등산로가 잘 정비된 편은 아니고요. 망곡산둘레길은 최근에 연천군에서 깔끔하게 잘 정비했습니다. 이쪽으로 가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계획을 확정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연천역이 가까워오자 서울에서는 그토록 급하게 정거장 사이를 달려 나가던 지하철이 막바지에 이르자 힘이 빠진 듯 덜커덩거리며 완행한다. 그래도 좌석에 푹 눌러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시간은 금방 갔다. 갓 지어 세련된 역사에 내리자 바로 망곡산둘레길로 가는 길을 나타내는 입간판이 맞이해 준다. 2번 출구로 나가면 한 걸음도 낭비하지 말라는 듯 망곡산둘레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꼬박꼬박 붙어 있다.
"지금 여기가 개성보다도 더 이북이란 걸 아시나요? 개성은 38선 아래고 여긴 38선보다 위입니다."
동행한 김신영 문화해설사가 설명한다. 그 말에 뭔가 감회가 더 새롭고 바람이 한층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유튜브 '러닝해영'을 운영하는 조해영씨는 이미 깡충거리며 앞서나간다. 둘레길은 나무계단으로 시작되는데 앞에는 '2024년 봄 망곡산 근린공원이 새로워집니다'라고 적힌 배너가 들어서 있다. 무장애 산책로·맨발 산책길·경관폭포 및 열린 수로·세족장과 화장실 등을 조성했다는 글 위에 진달래와 벚꽃이 산에 한가득 피어 있는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3월호를 2월에 만들 수밖에 없는 시차가 야속할 따름이다.
계단을 몇 걸음 오르자 왼쪽으로는 새로 조성된 무장애 산책로 580m가 지그재그 정상으로 길게 이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릎을 아끼고자 이 길을 택해 오르고 있다. 무릎 대신 시간을 아낄 요량으로 계단을 따라 직상한다. 살짝 땀이 날 때쯤 능선이 나온다. 길이 여기저기로 이어져 헷갈리는데 군자산둘레길과 연계해 걸으려면 오른쪽 능선을 따라 오르면 된다. 왼쪽 나무계단은 전망대로 간다. 그러니까 전망대를 찍고 되짚어 나와 걸으면 된다.
연천인들의 눈물바다, 아니 눈물산!
계단을 따라 오르자 생각보다 널찍한 전망대 부지에 놀란다. 주변 나무도 깔끔하게 정비해서 연천읍내가 훤하다. 2층 정자에 오르면 마을의 모습을 더 선명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지도를 보면 차탄천이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다가 연천읍내에 이르러선 동쪽으로 돌아서 남쪽으로 흐르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원래는 이게 지금 기찻길을 따라 직진하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현 읍내 부지를 조성하려고 흐름을 바꿔버려 지금에 이르렀다고 해요. 그래서 하천 정비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던 때에는 홍수로 읍내가 몽땅 잠기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너무나 쉽게 얻은 조망을 차분히 즐기다가 다시 길을 잇는다. 뭔가 까먹은 것 같은 기분에 걸음이 내키지 않았다. 일단 군자산둘레길 입구 방면 1.35km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숲 속의 쉼터란 이름의 정자가 길 곳곳에 들어서 있어 가는 걸음을 붙잡는다. 백패커라면 퇴근박으로 탐낼 만한 괜찮은 데크 사이트도 여럿 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호젓한 숲길이 찜찜한 기분을 금방 지워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야 비로소 생각이 난다.
"아 정상석!"
전망대에 정상석이 없었다. 다시 정상석을 찾으러 가야 하나 고민하며 2층 정자가 보이는 오르막을 마저 잇는데 흥미롭게도 바로 여기가 망곡산 정상이다. 무릎 높이에 해발 145m라고 적힌 비석이 이를 나타내고 있다. 망곡산 정상은 마치 요새 같다. 목조 정자를 현대식 참호가 둘러싸고 있다.
"망곡산望哭山의 나무들은 눈물을 머금고 자랐습니다. 산 이름이 고려가 망했을 때 개성에서 연천으로 도망 온 이들이 망한 나라를 그리워하며 곡을 했던 곳이란 전승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꼭 고려 때만도 아니고 조선이 망했을 때, 고종과 순종이 승하했을 때, 선정을 베풀던 고을 원님이 순직했을 때도 여기서 울었다고 해요."
설명을 들으며 옛 연천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하고 인정이 많았을지 헤아려본다. 또 얘길 듣고 나니 괜히 고요한 산세가 울적하게 다가온다. 정상에서 내려오니 곧 고속도로 같은 임도가 나온다. 소나무들은 멀찍이 거리두기를 한다. 후딱 달리듯 읍내리고개로 내려선다.
남자 정기 어린 군자산엔 군부대가
읍내리고개부터는 군자산둘레길이다. 들머리에는 군자산둘레길과 망곡산둘레길의 분기점임을 알리는 커다란 액자 조형물이 들어서 있다. 아쉬운 점은 두 둘레길 사이를 2차선 군도 6호선이 갈라놓고 있고 횡단보도도 없다는 점. 그나마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되고 평소 교통량이 거의 없는 점이 다행이다.
"군자산 정상에는 군부대가 있어서 평소 출입할 수 없어요. 가끔 신년일출 행사를 할 때만 열리곤 한답니다."
군자산둘레길 구간에 들어서자 제법 산을 타는 맛이 난다. 연천군상수도배수지에서 오솔길로 접어드니 산꾼들이 듬성듬성 달아 놓은 산행리본에 '왕재지맥'이라고 적힌 걸 볼 수 있다. 걷기길이라고 받아들이면 꽤 어렵고 사납지만 지맥 길이라고 생각하면 한결 쉽다.
길은 요동치고 굽이치지만 그래도 헷갈리진 않는다. 간혹 군에서 파둔 참호진지들이 진지 안으로 걸어야 할지 참호 둔덕을 밟아야 할지 아니면 다른 길이 있는지 고민에 빠지도록 만들지만 이정표만 잘 따르면 무리가 없다. 신갈나무와 잣나무를 번갈아 지나서 군자산 목덜미까지 남진하면 임도로 이어지는 읍내리샘고개다. 여기서 군자산둘레길을 더 길게 타려면 옥계리 방면으로 내려가서 잣나무골~논골연못~부처골~왕림리 성황당~군자산체육공원 순으로 돌면 된다.
약 6km 더 걷는 방법이다.
반나절에 마치기 위해 군자산둘레길 정자 방면으로 내쳐 걷는다. 우두커니 늘어선 낙엽송이 정겹다. 정자가 가까워지자 군자산 정상에 주둔하는 병사들이 달아둔 것 같은 발성장애물들과 야전선이 눈에 띈다.
"군자산君子山의 옛 이름은 '웅섬산(곰산)'이었다고 합니다. 연천이 장수왕 때 고구려 남진의 주요 교두보 역할을 했고, 고구려 사람들이 신성시 하던 동물이 곰이었거든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현재 군자산 정상부에 남아 있는 군자산성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해요.
또 하나 재밌는 건 군자산의 유래입니다. 북쪽 천덕산에서 내려오는 왕재지맥 산줄기가 군자산으로 향하거든요. 이 산줄기가 연천읍 상리에서 한 갈래 갈라져 나옵니다. 거기에 옥녀봉(205m)이라고 '그리팅맨'이란 거대 조각상이 있는 전망 좋은 명소가 있어요. 군자산하고는 78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죠. 옛 사람들은 이웃한 두 산을 보고 군자산엔 남자의 정기가 흐르고, 옥녀봉은 여인과 같이 포근하다고 해서 각각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조상님들 무섭네요. 군자산 정상에 군부대가 생길 거란 걸 내다봤나 봐요."
상상력과 호기심 자극하는 물레방아
군자산둘레길 정자는 망곡산둘레길 전망대 못지않게 조망이 시원하다. 한탄강이 응당 보여야 하지만 땅속에 웅크리고 들어앉아 흐르는 특성상 물줄기가 보이진 않는다. 절리가 발달해 하방침식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정자 옆의 그네를 타며 잠시 동심에 젖다가 이제 잣나무 가득한 하산길로 접어든다. 뚜벅뚜벅 걸어 내리는데 어디선가 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산중의 물을 끌어다가 샘터를 만들어뒀다. 간단히 손만 씻고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믿기지 않는 광경의 연속이다. 이 샘터의 물줄기를 가지고 크고 작은 물레방아들을 잔뜩 만들어뒀다. 지금은 물이 많이 흐르지 않는 탓에 제대로 돌아가지 않지만 그 모습이 기이하다. 거기에 정성스레 쌓은 돌탑과 석탑까지. 이상한 종교적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아니 이거 자세히 볼수록 완전 재밌는데요? 자전거 휠이랑 밥그릇, 시골집 빗물받이로 만들었어요. 전부 생활 폐기물들을 재활용한 거네요. 여기는 무슨 조각상 같은 게 있고 그 정수리에 물을 붓고 있나 본데요? 거대한 얼음괴물이 됐어요. 빙벽등반을 해도 되겠어요."
도대체 누가, 왜 이걸 만든 걸까? 한참동안 신기해 둘러보다가 마저 내려서니 군자산둘레길 해맞이길이라고 적힌 출구로 연결된다. 출구 옆에는 군자산성의 역사 유래가 적힌 안내판이 있는데 그 주변에 산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산 중턱에서 탔던 그네보다 더 큰 그네, 마찬가지로 방금 봤던 물레방아들보다 더 큰 물레방아를 지난다. 이윽고 마치 폐놀이동산의 입구처럼 '군자산공원'이라고 적힌 높다란 입구를 지나면 평범한 시골 마을길.
마침 지나가는 동네 주민이 있어 말을 붙여본다. 처음에는 갑자기 말을 거는 외지인에게 경계심을 품는 눈치였으나 신원을 설명하고 "순수하게 물레방아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여쭤보고자 한다"고 하니 술술 말해 준다.
"동네 시장의 젊은 사람들 여럿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겁니다. 누군지 딱 말해 주기는 좀 그렇고요."
"그런데 왜 물레방아인가요?"
"별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군자산둘레길 걷는 사람들이 재밌게 보고 즐기시라고 만들었어요."
이제 모든 의문이 풀렸다. 한바탕 재밌게 놀며 운동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인기척에 놀란 고라니 한 마리도 밭 위를 지나 산 중의 제 집으로 줄행랑을 놓는다.
산행코스
연천역~망곡공원~망곡산~읍내리고개~읍내리 샘고개~군자산둘레길 정자~군자산체육공원~연천역 7.8km
교통
연천역에서 출발하는 1호선은 오전 5시 27분에 첫차, 23시 30분에 막차가 떠난다. 배차간격은 약 한 시간이며 대개 30분 전후지만 매 시간마다 발차 시간이 조금씩 다르니 미리 정확한 시간을 확인한 후 움직이는 것이 좋다. 한 번 놓치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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