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히스토리 ②] 크라운, 위기를 먹고 태어나다
2024. 3. 15. 07:30
1945년 8월 14일, 연합군의 B-29 슈퍼포트리스가 토요타 코로모 공장에 폭탄을 쏟아부었다. 공장의 4분의 1이 완전히 파괴됐다. 다음 날인 8월 15일. 토요타 직원들이 폭격 피해를 복구하기 시작하는 동안, 라디오에선 이른바 '옥음방송'이 송출되고 있었다. 히로히토 일왕이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며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난 절대 직원들을 해고할 수 없다"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전시 체제에서 동원된 인력까지 포함해 9,500여명이 일하던 토요타의 직원은 3,700명까지 쪼그라들었다. 입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토요다 기이치로가 쥐고 있는 자산이랄건 없었다. 결국 직원들의 월급부터 문제가 됐다. 더욱이 연합국사령부는 트럭 외 다른 자동차의 생산은 일절 허가하지 않았다.
기이치로는 이 때, 사업 다각화로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트럭을 생산하는 한편, 연합국의 군용차 수리 업무를 맡는다. 차량용 유리를 제조하던 히라야마 공장은 콘크리트 제조시설로 개조해 건축 자재를 생산했고, 전자 부품을 만들던 미나미 공장에선 섬유와 옷감을 만들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1947년 승용차 생산이 허가됐지만 수입 부품 조립에 국한됐던 데다,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미군정 주도 하에 이뤄진 경제 안정화 조치에 따라 현금 흐름이 악화되며 트럭 판매량도 곤두박질쳤다. 곳곳의 영업소에서 출고를 거부하는 사례가 늘어났고 공장에는 300여대의 재고가 쌓이기에 이른다. 석탄 배급제가 중단되며 자동차 생산 원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토요타는 매달 2,200만 엔에 달하는 적자를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이치로는 직원들을 해고할 수 없다며 버텼다. 남아있는 자산이 없음에도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그러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기이치로는 임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토요타를 떠난다.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한국전쟁 특수를 맞은 토요타는 기사회생했지만 기이치로는 복귀 요청에 화답하지 못하고 고혈압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일본 최초 독자 승용차의 탄생
1949년, 연합국이 승용차 생산 제한을 전격 해제함에 따라 일본 자동차 산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난다. 닛산은 영국의 오스틴, 히노는 프랑스의 르노와 동맹을 맺고 라이선스 생산을 시작한다. 하지만 토요타만은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했다. 스스로 개척하지 않는다면 앞서나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토요타의 고집에는 이유가 있었다. 생산을 금지당했을 뿐, 연구개발에는 제약이 없었던 연합국의 조치 덕분에 전후 복구 중에도 승용차 설계와 엔진 제작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 기술 도입을 하지 않고 고집만 피운다는 세간의 비판에도 당시 토요타를 이끌던 이시다 다이조 회장은 "우리의 기술이 경쟁사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겠다"라며 의욕적으로 나섰다.
그렇게 출시한 SA와 RH는 트럭 섀시를 기반으로 견고한 내구성을 갖춰 택시 시장을 중심으로 조용한 흥행을 누린다. 당시 영업소마다 달랐던 자동차 가격을 통일하는 '원 프라이스 정책'을 도입하고 품질 보증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당시로선 낯선 제도를 도입하며 경쟁력을 키웠다.
1955년 등장한 크라운은 토요타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SA와 RH가 '고유 차종' 이었던 반면, 크라운은 거의 모든걸 직접 완성해낸 일본 최초의 '독자 차종'이었다. 트럭 섀시 대신 승용차에 맞는 프레임을 짰고 여기에 더블 위시본과 코일 스프링 구조를 결합한 새로운 서스펜션을 얹었다. 후륜에도 트럭에 쓰던 판스프링 대신 타원형 스프링을 적용해 승차감을 끌어 올리는 데에도 집중했다.
엔진은 토요타가 고심 끝에 만들어낸 1.5ℓ R 시리즈 엔진. 최고출력 48마력은 3단 수동변속기를 거쳐 뒷바퀴로 전달했다. 그 시절로서는 흔치 않게도 브레이크와 클러치는 모두 유압식으로 작동됐고 뒷좌석은 4명이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벤치 시트로 설계해 6명이 탈 수 있었다.
일본의 도로 여건에 최적화된 승차감과 내구성까지 확보한 크라운은 날개돋친듯 팔려나갔다. 라디오와 히터 같은 당시로선 고급 기능을 갖춘 크라운 디럭스가 부유층과 기업, 정부에 팔렸고 뛰어난 내구성이 호평받으며 택시 시장에서도 인기를 모았다. 최초의 크라운에 대한 평가가 어땠는지는 일본의 자동차 잡치 모터팬(1995년 3월호)에도 상세히 기술되어있다.
"국제 표준에 맞는 만듦새와 기능은 물론, 일본의 도로여건을 고려해 설계된 서스펜션과 브레이크 시스템은 감탄할 만 하다", "일본산 자동차가 이 정도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에 진심으로 안도감을 느낀다. 크라운은 우리에게 일본차로서 완전한 믿음을 줬다" 등이다.
▲태평양을 건넌 크라운, 절반의 성공에 그치다
"수입차가 일본 시장을 장악하게 둘 수 만은 없다"던 기이치로의 신념이 탄생시킨 토요타의 눈은 일본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라운이 일본에서 흥행하자 토요타는 곧장 해외 진출을 추진한다.
가장 먼저 시작한건 대외적인 신뢰성 확보. 1957년 토요타는 크라운을 앞세워 1만 마일(약 1만6,000㎞)을 달려야 하는 호주 라운드 랠리에 진출한다. 크라운은 첫 대회 출전에 해외 참가 제조사 3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했고 이는 일본산 승용차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다.
랠리 대회 결과에 고무된 토요타는 그 해 미국 진출을 시작하지만 시작부터 쉽지만은 않았다. 수출을 위해선 규격화된 테스트 트랙에서 고속 주행 안정성을 확보하고 이에 따른 시험 결과를 공유해야 했다. 토요타가 총 연장 2㎞ 가량의 고속 주회로를 만든 것도 이 때다.
더욱이 미국 전역에 크라운을 팔기 위해선 각 주(州)의 각기 다른 인증도 획득해야 했다. 대표적인게 캘리포니아. 당국이 제시한 헤드램프 규격은 크라운과 맞지 않았다. 결국 토요타는 헤드램프가 없는 크라운을 선적해 미국에서 제너럴일렉트릭(GE)의 헤드램프를 별도로 장착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고도 크라운은 문제를 일으켰다. 속도로 비중이 높은 미국 도로는 크라운과 맞지 않았다. 엔진 배기량을 1.9ℓ로 키웠지만 더 높은 배기량을 지닌 미국차들과 동등하게 달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소음과 진동, 부품 파손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다른 브랜드들의 발빠른 움직임도 경쟁력을 악화시켰다. 일본차가 미국에 진입하자 쉐보레와 포드, 크라이슬러는 크라운과 비슷한 크기의 소형차 출시를 이어갔고, 1960년 토요타는 크라운 수출을 전격 중단하기에 이른다.
▲뼈를 깎는 변화, 시대의 아이콘을 만들다
미국에서의 성패와는 별개로, 크라운은 일본에서 성공가도를 달린다. 뼈를 깎는 개선을 통해 고급 세단으로 거듭나기 위한 대대적인 변화를 추구한 결과다.
크라운의 파격적인 변화는 1962년 등장한 2세대를 통해 잘 드러난다. 4,285㎜였던 전장은 4,610㎜까지 늘렸다. 긴 후드 아래에는 직렬 6기통 엔진을 얹어 힘을 키웠고, X자형 섀시 구조를 채택해 강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확보했다.
1964년 토요타는 기존의 크라운보다 더 고급스러운 '크라운 에잇(Eight)'도 라인업에 추가한다. 일본차 최초로 V8 엔진을 탑재했고, 전장은 4,720㎜까지 키웠다. 이를 통해 당시 부유층들이 타던 미국산 대형 승용차와 정면 승부를 벌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다.
그렇게 크라운은 16세대의 걸친 변화를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랜 기간 역사를 이어왔다보니 크라운은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표적인데, 그는 1Q84에서 크라운에 대해 제법 상세한 설명을 기술했다.
"실내는 고급스럽고, 시트 쿠션은 뛰어나다. 바깥 소음은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음향 장비의 음질이 뛰어나다, 차음에 관해서라면 토요타는 세계에서 손꼽는 기술을 갖고 있다" 이처럼 토요타의 정신이자 고급 세단의 기준을 세웠던 크라운은 빠르게 성장하며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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