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5일!] 4할 사전투표와 피아노·샌드위치표… 최악의 선거

차화진 기자 2024. 3. 15.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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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15일 이승만은 4선에 도전하며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사진은 서울 시내 자유당 중앙당부 앞에 고시된 선거 개표판을 지켜보는 시민들. /사진=대전국가기록정보센터
1960년 3월15일.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가 발생했다. 당시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4번째 집권에 도전하며 선거 준비 과정에서부터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선거 당일 자유당은 사전투표, 3·5·9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부정행위를 자행했다. 그 결과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 부통령의 표가 100%에 육박해 79%로 낮추는 촌극이 벌어졌다.

노골적인 부정선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마산 시민들은 "선거 무효화"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경찰은 시위 군중을 밀어붙이며 실탄 사격을 감행했고 꽃다운 청춘 9명이 사망했다.



"무슨 수를 쓰든 당선시켜!"… 물불 안 가린 '부정행위'


3월15일 치러진 선거에서는 온갖 부정행위가 자행됐다. 사진은 3·15선거 마산시 개표결과가 발표된 마산일보 특보.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을 두 번이나 단행하며 4선에 도전했다. 당시 이 대통령의 나이는 85세. 평균 수명이 짧았던 시절, 자신이 사망하면 이기붕 부통령이 권력을 승계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자유당 강경파인 최인규 내무장관은 경찰 간부들을 불러 모아 "콩밥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 가도 내가 간다. 무슨 수를 쓰든 두 사람을 당선시켜"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최악의 부정 선거가 시작됐다. 유권자의 40%가 이미 기표한 투표용지를 미리 넣어둔 4할 사전 투표와 여러 사람이 함께 들어가서 투표용지를 공유하고 참관인에게도 공개하는 3·5·9인조 공개 투표가 자행됐다. 유권자 수보다 표가 더 많이 나와 도로 빼내 불태우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개표 과정에서도 부정행위는 계속됐다. 개표 도중 손가락에 인주를 묻힌 뒤 반대표에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듯 문질러 무효표를 만드는 피아노표. 반대표에 표시를 하나 더 해 무효표로 만든 쌍가락지표. 야당 표 뭉치 위아래 여당 표를 한 장씩 끼워 모두 여당 표로 만드는 샌드위치표. 그걸로도 모자라 개표 도중 정전시킨 후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는 올빼미 개표까지 이뤄졌다.

3월17일 대한뉴스는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입후보자이신 이승만 박사가 총유권자의 86%인 963만3376표로 당선이 확정되고 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기붕씨가 총유권자의 74.5%인 833만7052표를 얻어 당선됐다"고 알렸다.

이로써 자유당은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선택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만다.



"선거 무효!"… 부정선거 목격한 마산 시민들의 외침


부정선거가 발각된 후 마산 시민들은 곳곳에서 모여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외쳤다. 사진은 민주당사 앞으로 집결하기 시작한 마산 시민들. /사진=3.15의거기념사업회
같은 시각 사전 투표를 눈치챈 야당 측 참관인이 "투표함을 열어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황한 여당 측 참관인은 "빈 투표함을 뭐 하러 확인하냐"며 반박했다. 결국 양측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며 투표함이 쓰러졌다. 그 투표함 안에서 모두 이승만과 이기붕을 찍은 표가 쏟아져 나왔다.

"사전투표를 적발했다!" "야 이 표 도둑놈들아!"

여기저기서 사전 투표가 발각됐다. 오전 10시30분 민주당 마산시 당사는 선거를 중단하는 벽보를 붙이고 전국에서 최초로 선거 포기 선언을 발표했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는 불법 무법 선거다. 인정할 수 없다"고 외쳤다.

마산 시민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민들은 "부정선거 다시 하라. 투표할 권리를 다시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녀노소 모두 모여 하나가 된 마산 시민들은 경찰과 대치했고 강제 연행되는 사람도 발생했다. 그런 와중에도 부정 개표는 계속되고 시위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시내 곳곳에서 모여드는 시위대와 시위대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실탄 사격을 자행했다. "부정선거 무효"를 외친 시민들은 밤늦게까지 시위하다 자정이 돼서야 해산했다.



"어떻게 사람 얼굴에 최루탄이"… 김주열 열사의 죽음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을 본 국민들은 분노했고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국화가 놓여있는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 김주열 열사 묘비. /사진=뉴스1
그런데 다음날, 그다음 날이 돼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김주열.

당시 시위에는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고등학생이었던 김주열 열사도 자기 형과 함께 시위에 동참했다가 행방불명됐다. 실종된 지 27일 만에 김주열 열사는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의 시신으로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올랐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보고 분노한 마산 시민들은 그날 2차 항쟁을 시작했다. 이 항쟁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50여명이 경찰에 쏜 총에 맞거나 체포 구금됐다. 마산 시민의 투쟁과 경찰의 가혹한 탄압은 전 국민에게 슬픔과 분노를 불러일으켜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지 보름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최악의 부정선거에 반발한 마산 시민들의 대규모 항쟁이자 현대사 최초의 민주·민족운동인 3·15의거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그날의 희생과 함성이 만들어낸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차화진 기자 hj.cha9@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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