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한국인] 불안한 연예인의 삶…'관종'인 나를 그렸다

박준식 머니투데이 뉴욕 특파원 2024. 3. 1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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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국의 아트테이너 '권지안, 고준, 이민우'의 맨해튼 소호 상륙기
[편집자주] [뉴욕의 한국인]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뉴욕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활약하는 한국인과 한국계 코스모폴리탄들의 분투기를 찾아 고국에 전하겠습니다.

마흔이 넘어서야 배우로서 빛을 보게 된 고준(본명 김준호)."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를 무채색으로 바라보고 싶었다"는 그는 붓을 들었을 때 희열을 느끼고 스스로를 지켜볼 수 있었다고 했다.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불안한 나를 기피하다가 한숨 내려놓고 나 스스로를 한 번쯤 진지하게 독대해 보기로 했다. 그 도구를 그림으로 삼아보았다. 적어도 그건 술이나 약물보다는 나를 파괴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홀로 붓을 들었을 땐 그 어떤 색깔도 칠해지지 않는 나를 맞이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과히 의식하지 않고 거울 앞에서 홀로 무채색의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고 배우 고준은 말했다.

그럴 만하다. 선 굵은 연기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줄 알았더니 마흔이 넘어서야 빛을 본 사례다. 이십 대엔 배고픈 연극단 생활이 힘겨워 연기를 포기하기도 했다. '김준호'란 이름이 흔해서 본디 나를 버리고 예명도 만들었다.

연기에 혼을 불어넣는다고 하지 않나. 그러기 위해 작품마다 몇 달씩 그 사람이 돼보면 희열은 있었지만 어느새 일상의 나로 돌아오기 힘들었다. 이러다가 나는 없어져 버리는 게 아닐까.

마음의 병이 커졌던 어느 날부터는 1년 넘게 치료도 받았다. 그래선지 그림의 주제는 '관음'이다. 누군가를 연기한다는 것도 그걸 보는 것도 모두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게 아니냐는 스스로의 해석이다. 그의 그림에는 각기 다른 페르소나가 숨어있다. 나를 지켜볼 수도 있고 나를 보는 누군가를 훔쳐볼 수도 있다.

스무 살때부터 스타로 살아온 가수 이민우. 그는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은 흘러가고 때론 아쉬움을 느꼈다. 그 즈음 누군가에 의해 붓을 잡았고 새 인생을 살게 됐다.
가수 이민우는 비슷하지만 반대의 경우다. 이미 스무 살부터 스타로 살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찰나일 뿐이다. 기량은 무르익었지만 시간은 이십 년이 넘게 흘렀다. 영광을 함께 했던 동료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 나간다. 그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건만 시간 앞에서 우리는 모두 패자일 뿐이다.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그런데 내 삶을 온전히 살고자 하던 그사이 폐부를 찌르는 배신도 겪었다. 어느 순간 주변을 깡그리 신뢰할 수 없게 되기도 했다. 의지할 만한 것은 대부분 스스로를 병들게 했기 때문이다.

방황하던 그때 누군가 붓을 쥐여 주었다. 유년에 꿈을 꾼 적이 있었지만 그보다 춤을 더 잘 추었기에 한동안 놓고 있던 기억이다. 27년 전 입시를 위해 잡았던 붓이 지금은 해소되지 않는 불안을 덮어주는 친구가 됐다.

캔버스를 다시 마주 앉은 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가볍다. 가족을 위해 견디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어서다. 그림을 그리는 이민우는 18살로 돌아가 있다. 어찌보면 새 인생을 사는 것이다.

권지안(가수 솔비)은 남들의 수군거림과 오해로 고단했던 가수로서의 삶에 이어 화가로서도 초기엔 질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트테이너로서의 그는 개척자란 수식어와 함께 어느 새 화단에선 대선배가 돼 있었다.
권지안은 그림을 그린 시간이 이제 벌써 12년이다. '솔비'라는 캐릭터로 살아온 기억보다 화가로 살아온 나날이 삶을 더 압도한다. 초기엔 정말 욕도 많이 먹었다. '쟤 관심받으려고 또 엉뚱한 짓 한다'는 수군거림이 태반이었다. 팔 할은 오해였다. 하지만 그걸 지속하는 힘으로 이겨내면서 더 깊고 단단해졌다.

프로화가 권지안은 기성화단 일부에게 한 때는 질시의 대상이었다. 다수의 화가 지망생들에게 시장은 협소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바닥이 그렇지 않나. 빈센트 반 고흐도 죽기 전까지는 빈곤에 시달렸다. 누군가 유명세로 쉽게 성공했다는 얘길 들으면 흠잡고 싶은 건 당연지사다.

하지만 '아트테이너' 거품 논란이 역설적으로 그에겐 개척자란 타이틀을 부여했다. 화단에선 떠오르는 신예이지만 비슷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선배들에겐 그가 오히려 대선배가 되어 있다.

또 다른 나를 찾고 싶어, 그 수단을 그림으로 삼아온 이들이 뭉쳐 뉴욕 소호에서 한 달여간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 2월1일부터 한 달간 맨해튼 소호 파크웨스트 갤러리에서 이들 3인과 미디어 작가 심형준(네거티브), 설치 작가 최재용 등 5인이 30여 점을 내놓고 현지 평단의 가늠자를 맞대어 본 것이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큐레이터 김승민이 기획한 '소호스 갓 서울(SoHo's Got Seoul)' 특별전은 맨해튼 컬렉터들에게 한국은 물론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기획자는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큐레이터 김승민(스테파니 김)이다. 김승민 큐레이터는 영국 왕립예술학교(RCA) 박사 출신으로 뉴욕에 정착한 2년간 기업과 콜렉터 사이에서 소호살롱 시리즈로 스스로를 브랜딩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의 이른바 '아트테이너'라는 테마가 뉴욕 소호에서도 경쟁력이 있는 지 견줘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그 시도는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소호스 갓 서울(SoHo's Got Seoul)'이라고 이름 붙인 이 특별전에 대한 관심은 추가적인 시도를 이어갈 수 있는 다리가 됐다는 평이다. 뉴욕에서 불고 있는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시너지를 일으켜 맨해튼 컬렉터들에게도 흥미로운 장르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김승민 박사는 "서울에서 그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개인 작품 활동을 하는 배우, 가수, 문화계 종사자들의 모임이 최근 활발해지고 있어 지난 십여 년간 유럽에 한국 예술가를 소개했듯, 글로벌 예술의 집합지인 뉴욕에도 한국 아티스트 신을 소개하고 싶었다"며 "이들에게는 뉴욕이란 새 마켓을 알리고 뉴욕의 컬렉터들에겐 새로운 장르를 선보일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준식 머니투데이 뉴욕 특파원


박준식 머니투데이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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