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 표지 그린 작가의 서재에 '자본론'이 있는 이유
미술 비전공자로 '불편한 편의점' 대박 터트려
개인 전시회, 에세이 이어 해외 진출까지 모색
불안한 20대 자유롭게 살라는 책 덕분에 버텨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말하자면 '빨갱이'였군요." 그러자 막 웃었다. "제 남편이 그런 얘길 해요. 성향이 전 좀 사회운동가 같은 스타일이고, 제 남편은 안보를 중시하는 쪽이거든요. 하하." 이질적인 조합은 부부만이 아니다. 그런(?) 책을 보던 사람이 어쩌다(?) 이런 서정적인 그림 작업을 하게 됐을까.
"남편에겐 좀 비현실적이란 얘기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저의 힘 아니었을까요. 전 제가, 그냥 좀 잘될 거라고, 성공할 거라고 믿는 편이거든요. 남들은 뭐라 해도 그중에서 제게 제일 유리한 말만 골라 듣는달까요. 하하." 역시 삶을 긍정적으로 사는 데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만 한 게 없다.
근자감으로 뭉친 출판계 핫 일러스트레이터
반지수 작가의 인천 검단신도시 아파트 집에 들어서자 고양이 두 마리가 맞이했다. 노란 녀석은 토니, 고등어 무늬 고양이는 토르라 했다. 토르는 심드렁한 듯 근엄했고, 토니는 낯선 손님에게도 선뜻 다가와 몸을 한껏 비벼댔다. 거실 한편엔 빈틈없이 책을 꽂아두는 데 최적화된 사이즈로 별도 제작된 책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책장들 맞은편엔 일러스트 작업을 위한 컴퓨터와 태블릿이 놓인 넓은 책상이 있었다.
이 정도면 '책 표지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에 어울려 뵈는 풍경이다. 그런데 그 책장엔, 물론 일부이긴 하지만 '정치경제학 교과서' '국가와 혁명' '맑스주의 역사 강의' '자본론' '한국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글쎄, 이런 책들이 북 일러스트와 어울리던가.
반 작가는 요즘 출판계에서 가장 핫한 표지 일러스트레이터다. 2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불편한 편의점'을 비롯, '패밀리 트리'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오늘도 고바야시 서점에 갑니다' '여기는 커스터드, 특별한 도시락을 팝니다' 같은 책들의 표지를 그렸다.
"소설 '불편한 편의점' 표지, 제가 그렸습니다"
책은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글자 위주 매체다 보니 표지 디자인도 대개 글자 중심으로 간다. 제목이나 작가 이름을 돋보이게 하거나, 그림이나 사진을 쓴다 해도 제목을 해치지 않게 분리해 두거나 여백을 크게 쓰는 편이다. 그런데 반 작가는 많은 색을 써서 구체적인 사물과 사람을 애써 자세히 묘사해 둔 맑은 풍경화 느낌의 그림을 그렸다. 다른 길을 간 셈인데 이게 되레 좋은 반응을 얻었다.
책 표지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지난해엔 홍익대학교 앞 갤러리에서 개인 초대전도 열었다. 소품이긴 했지만 책 표지 작업과는 무관하게 별도로 그린 그림 20여 점도 함께 선보였다. 작가 개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반지수의 책그림'이란 에세이도 냈다. 이 책 표지엔 개인전 때 선보였던 그림을 그대로 썼다. "갤러리스트 말씀으론 이 표지 그림의 원작을 '미술계의 엄청 큰손'이 사 가셨다고 하는데 누가 사 가셨는지, 저도 궁금해요."
올해엔 '반지수의 책그림'에 이어 에세이 3권에다 컬러링 북 1권을 추가로 낼 예정이다. 한 해 5권의 책을 쏟아내다니. 반 작가라는 사람, 그리고 반 작가의 그림 자체가 이제 어느 정도 하나의 '브랜드'처럼 인식이 되고 있다는 의미다.
개인전도 열고 내친김에 해외 진출까지
곧 일본으로 건너가 북 토크도 한다. 반 작가의 그림이 해외 시장에서도 '먹힐 것'이란 판단에 따라서다. 그러고 보니 '불편한 편의점'이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같은 책은 해외 수출본에서도 반 작가의 그림을 그대로 썼다. 수입도 꽤 쏠쏠하다. "국내 서적은 일회성 매절 계약으로 끝나는데요, 책이 잘나가면 사장님이 인센티브처럼 보너스를 얹어 주시기도 해요. 해외에 나간 책은 저작권이 제게 있어서 판매될 때마다 수입으로 들어오고요."
최근엔 유명 남성 아이돌 그룹으로부터 협업 제안도 받았다. 이름값도 높일 수 있고, 그림에 그치지 않고 애니메이션까지 하는 작업이어서 수입도 쏠쏠할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성사되진 않았다. 주변에서는 아까운 기회라 하지만, 정작 반 작가는 무덤덤하다. 그런 작업은 당연히 상업적 요구가 뒤따르게 마련이고, 그러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에서다. "일 내용적인 면에서는 작가로서 존중해 주고 대우해 주는 출판계 쪽 일이 더 낫다"고도 말했다.
이 정도면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은, 자존심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를 떠올릴 법도 한데, 반 작가는 그게 아니었다. 물론 어릴 적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집도 너무 시골이고 집안 형편상 뒷받침을 해줄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어서" 접은 뒤론 사회운동가를 꿈꿨다.
사회 부조리에 일찍 관심 있던 시골소녀
대학 전공도 정치외교학, 법학을 했다. 이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궁금했고, 거기에 대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인권변호사를 꿈꿨고, 국가인권위원회를 기웃대기도 했다. '정치경제학 교과서' 같은 책들은 그때의 흔적이다.
그러고 보니 반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첫 만화책이 '너에겐 노조가 필요해'였다는 사실도, 그 시절의 흔적이라면 흔적이다. 그간 표지 작업을 해온 책 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 중 하나로 'N분의 1을 위하여'를 꼽은 것도 그렇다. 이 책은 청소년 노동 실태에 대해서 다룬 연작 소설집이다.
방황은 대학 졸업할 무렵, 23세쯤 본격화됐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결국 그림으로 돌아갔다. 뭔가 만드는 직업을 하고 싶었다. 쉽진 않았다. 굳은 손을 풀어야 했고 따로 배운 게 없었으니 독학을 거듭했다. 애니메이션 회사에도 들어갔지만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더니 결국 권고사직을 당했다. 뭔가 해보려는 순간 밟혀버린 그 20대 때 반 작가를 버티게 해준 건 몇 권의 책이었다.
"네 눈으로 별을 보라" '개밥바라기별'의 가르침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 뒤늦게 화가가 된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소설 '달과 6펜스'가 그중 하나였다. 소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나이 마흔에 일과 가정을 모두 버리고 화가가 된다. 그에 비해 몸이 훨씬 가벼운 나는 지금 무엇을 망설이고 있다는 말인가. 스트릭랜드의 결단을 보고선 "가슴이 활활 불타올랐다"고 했다.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란 책도 반 작가를 자극했다. 자기네들 세계에선 나름 유명하다면 유명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거의 모른다 하면 모를 수도 있는 화가, 만화가, 연극배우 등 젊은 예술인 10여 명에 대한 인터뷰를 모아 둔 책이다. 불확실한 미래에도 자기 꿈을 갈고닦으며 이 길을 가겠노라고 선언하는 청춘들의 이야기에서 힘을 얻었다.
소설가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황석영의 자전적 청춘 소설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반 작가는 스스로의 눈으로 별을 보려고 하는 주인공 준의 태도에 반했다.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에 홀딱 빠졌다. 한때 살짝 부작용도 있었다. "대학 시절엔 이 책에 한창 빠져서 '나 이제 그림 그릴 거니까 자퇴할 거야' 같은 소리도 하고 다녔어요. 주변에서 다 말리고 쟤가 왜 저러나 하는 눈빛으로 봤었죠. 하하." 이런 책들은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지금 이 길이 틀리지 않았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데 크게 도움을 줬다.
'반지수의 책그림' 등 올해에만 책 5권 출간
책 표지 일러스트와의 인연은 2018년 시작됐다. 한 포털사가 운영하는 포트폴리오 사이트에 올려 둔 그림을 본 출판사가 연락해 와 작업한 '반딧불 의원'이 일종의 데뷔작이다. 의사가 쓴, 퇴근 뒤에야 문을 여는 병원을 통해 한 마을을 지키는 주치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었다. 밤에야 병원을 찾을 수 있는 소시민들의 애환을 다룬 소설 자체도 재미있었고, 그 사연들을 품은 밤 풍경을 아름답게 잘 묘사해냈다는 좋은 평가도 받아서 아주 흡족한 작업이 됐다.
이후 작업을 이어가다 2021년 만든 '불편한 편의점'이 속된 말로 '대박' 나면서 작업 의뢰가 줄 잇기 시작했다. 반 작가 스스로도 "무서울 정도로" 작업 제안이 들어왔단다. 올해는 본인의 책을 써야 해서 되도록 거절하는 편이지만, 지금도 한 달에 두 권 정도는 꼬박꼬박 작업한다.
책 표지 작업도 쉽지 않다. 원고를 읽고 구상하고 협의를 통해 최종안을 확정하기까지 꽤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해서다. 그 과정을 거치려면 한 달 두 권 정도가 적당하다는 요령이 생긴 것. 이제 이름값이 제법 돼서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있다기보다는 "작가님이 원고 보고 판단해서 알아서 잘 만들어주세요"라는 의뢰도 제법 된다.
회화와 그림책, 새로운 도전 시작한다
앞으로는 책 표지에서 좀 더 별도의 독립적 작업을 해볼 생각이다. 하나는 회화다. 다른 하나는 단독 그림책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쪽은 아무래도 인공지능(AI)에 대한 걱정이 커요. AI에 대체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있는 거죠. 거기다 원래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대개 화가를 꿈꾸시다 여건이 안 돼서 오신 분들이 많거든요. 그림에 대한 도전의식이 있는 거죠."
반 작가도 그 흐름 위에 있다. "저 또한 책 표지 작업이 너무 재미있지만, 이제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지난해 개인전의 즐거운 경험도 힘이 됐다. 그림책도 욕심이 난다. "내가 하면 이런 스토리로 이런 그림을 그리겠다고 구상해둔 아이디어들은 정말 많아요."
집 한편엔 이미 작업실도 마련해 뒀다. "시작해야 하는데 지금은 재료만 엄청 사고 있어요. 마음은 급한데, 하하." 자신 있을까. "글쎄 전 이상하게도, 제가 잘할 거란, 잘될 거란 믿음이 있다니까요." 그 믿음은 20대 때 만난 스트릭랜드가, 무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그리고 준이가 슬쩍 일러준 삶의 비밀 같은 것이리라.
인천= 조태성 선임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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