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입신(立身)과 행도(行道)

한겨레 2024. 3. 1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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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신양명(立身揚名)이란 말이 있다.

아, 이름난 연예인이 되는 것도 입신양명의 하나일 것이다.

쌍교(雙轎) 독교(獨轎)를 타고 따라다니며 아내가 남편의 입신양명을 함께 누렸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입신양명은 '효경'(孝經)의 "입신해 도(道)를 실천하여 후세에 이름을 드날리고 그럼으로써 부모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끝이다(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는 문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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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자료사진

입신양명(立身揚名)이란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사회에서 떳떳한 자리를 차지해 자신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는 것, 곧 유명해지는 것을 말한다. 세속적 차원의 예를 들자면, 행정고시나 사법시험에 합격해 고위 관료가 되는 것, 판사·검사가 되는 것, 명문대학을 졸업해 유명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 아, 이름난 연예인이 되는 것도 입신양명의 하나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입신양명은 단 하나다. 과거에 합격해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거 합격에 대한 열망은 현대인이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예컨대 1800년 3월21일 경과(慶科) 정시(庭試)의 1차 시험에 응시한 사람은 11만1838명,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은 3만8614명이었다. 이때 서울 인구 20만명 남짓이었다. 다음날 춘당대 인일제(人日製)의 1차 시험에 응시한 사람은 10만3579명,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은 3만2884명이었다. 답안지 제출자를 지역별로 보면, 서울 2211명, 경기도 3586명, 황해도 3111명, 평안도 3173명, 충청도 6096명, 강원도 1025명, 전라도 4700명, 경상도 5231명, 함경도 1025명, 수원 368명, 광주(廣州) 356명, 개성 210명, 강화도 90명, 제주 3명, 거주지 불명이 766명이다. 응시자는 전국적이다.

이중 2차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단 2명이었다. 이 2명이 관직을 얻기 위해서는 다시 2차 시험을 치고 최종 합격자가 되어야 하였다. 이처럼 과거에 합격해 관직을 얻고 입신양명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경상도 지방에서 널리 읽던 ‘복선화음가’(福善禍淫歌)라는 가사가 있다. 현명한 여성이 가난한 집에 시집가서 집안을 경제적으로 일으키고 남편 뒷바라지를 한다는 내용이다. 이 가사에 조선시대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이 잘 나타나 있다. 아내의 희생과 지원으로 남편은 과연 바늘구멍을 통과해 기름진 안변부사·동래부사 등의 수령직을 거치고, 승지를 지낸 뒤 그 좋다는 평안감사가 된다. 당연히 한몫 단단히 잡아 재산도 늘렸다. 쌍교(雙轎) 독교(獨轎)를 타고 따라다니며 아내가 남편의 입신양명을 함께 누렸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입신양명은 ‘효경’(孝經)의 “입신해 도(道)를 실천하여 후세에 이름을 드날리고 그럼으로써 부모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끝이다(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는 문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도(道)를 실천한다(行道)’란 부분을 빼고 ‘입신양명’이 되었다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도의 실천’은 곧 선량한 가치의 실현이다. 과거에 합격해 관료가 되었다면, 백성을 위한 행정을 해서 이름을 날려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들의 ‘입신양명’에 ‘행도’가 삭제되어 있었던 것은 역사가 입증한다.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과거에 합격해 고위관료가 되었던 것과 같다. 그런데 이 당(黨), 저 당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국회의원으로 ‘입신’하면 ‘행도’를 팽개치고 제 한 몸의 이익에 골몰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다음달이 총선이다. 입신파(立身派)를 떨어트리고 행도파(行道派)를 골라내어야 한다. 이 불의(不義)와 퇴행, 무능의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은 야멸찰 정도로 냉정해야 할 것이다.

강명관/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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