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모두의 사생활

한겨레 2024. 3. 1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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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여 문어의 목을 살핀다.

목에서 문어의 향이 번진다.

집이 지옥 같아도 주위는 그 향으로 채운다고 했던 문어.

흡연하는 청소년이 냄새를 숨기는 용도로 볼 수 있겠지만, 담배나 향수 모두 그 시절 문어가 자기만의 공간을 만드는 행위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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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사과의 사생활
조우리 지음 l 위즈덤하우스(2023)

“문어, 오늘은 다친 곳 없어?”

“응. 넌?”

“난? 똑같지. 또 아빠한테 욕먹었어. 목 상처는 어떻게 됐어?”

고개 숙여 문어의 목을 살핀다. 엄마에게 맞아 생긴 붉은 상처가 갈색으로 변했다. 목에서 문어의 향이 번진다. 바다를 닮은 향. 집이 지옥 같아도 주위는 그 향으로 채운다고 했던 문어. 흡연하는 청소년이 냄새를 숨기는 용도로 볼 수 있겠지만, 담배나 향수 모두 그 시절 문어가 자기만의 공간을 만드는 행위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냄새로나마 공간을 만드는 일.

열일곱 문어와 열여섯 나는 몰래 사귀는 사이였다. 비밀이어야 했다. 청소년의 본분은 공부라는 명령은 강력해서 규칙을 벗어난 사생활은 금지였으니까. 집과 학교는 꾸역꾸역 몸을 맞춰야 하는 공간이고, 거리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아파트 201동, 209동에 살던 문어와 나는 아파트 구석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어린 것들’이 벤치에 앉아 몸을 포개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웃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춘기 청소년들의 호기심과 호르몬이 부를 사고를 예상하며 안타깝게 봤을지도. 불량한 애들이니까 피하자고, 쟤네 어떻게 살지 뻔하다고 혀를 찼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알면 화내실 거야. 앞으로는 더 구석진 곳에서 만나.” 가까운 이웃 어른이 나를 위한다며 했던 조언. 금기는 공포와 애틋함을 일으켜, 우리는 어두컴컴한 장소로 밀려났다. 씻지 않은 손으로 몸을 만졌다. 아마 자주 냄새가 났던 걸 기억하면 질염에 시달렸을 텐데, 알 수 없었다. 알지 못했다. ‘안 돼’만 있는 세계였으니까.

당시 내 감정은 호기심과 성적 욕망, 위안이 섞여 있었다. 30대가 훌쩍 지나 연인에게 느끼는 지금의 감정도 비슷한데, 10대라는 이유로 모든 감정은 가볍게 여겨졌다. 분노와 슬픔, 피해를 호소해도 가볍게 해석되는 세계에서 하물며 사랑이라니. 그 시간이 나에게 하루를 살아갈 유일한 안식이라는 사실을 믿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가끔 “사랑해” 말할 때면 우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직 그 단어가 너무 이른 건 아닐까, 의심을 벗지 못했다.

나이에 따라 사랑과 상실과 고통의 무게를 달리 재는 문화를 믿지 않는다. 문어는 내 가족의 모든 장르를, 그 알쏭달쏭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선생님도, 원가족도, 친구들(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편적이면서도 뾰족한 각자의 설움을 안고 지냈던 내 친구들)에게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던 사람. 만날 때마다 ‘러브장’을 교환하며 혼잣말을 대화로 바꿔준, 내 최초의 독자 문어를 떠올린다.

“불장난일 뿐이야. 정신 차려.” 단지 어린 감정이라며 한심하게 보던 시선이 따라온다. 내 기억을 침범하는 말들. 그 말들을 벗으려 나는 ‘사과의 사생활’을 읽었나 보다. 조우리 작가의 소설집 ‘사과의 사생활’은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되어 있다. 책을 다 읽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각 등장인물이 놓인 위치와 사회경제적 자원, 청소년이라는 위치도 주의 깊게 읽혔지만, 나는 등장인물의 서사와 감정에 푹 빠져버렸다. 당연하게도, 가볍지 않았다. 사과의 마음을 읽는 건 내 지난 시간을 다시 읽는 일이었다. 모두의 사생활에서 배제된 존재들을 떠올리는 일이었다. 그때 갖지 못한 사생활을 이곳에 적는다. 글자로나마 공간을 만들려고, 그 모든 걸 믿기 위해서.

홍승은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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