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마르케스도 모르는 마르케스 공개 유작의 ‘진짜’ 비밀

임인택 기자 2024. 3. 1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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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
‘8월에 만나요’ 30개국 동시출간
“출간 말라” 불구 사후 10년만
‘여성 첫 주인공’으로 헌사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과 대칭
소설 ‘백년의 고독’ 등을 남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의 둘째 아들 곤살로가 지난 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도서관에서 열린 부친의 미발표 소설 ‘8월에 만나요’(원제 ‘En agosto nos vemos’) 공개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8월에 만나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l 민음사 l 1만6000원

‘마술적 사실주의’를 창시한 남미 문학의 거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 타계 8년 뒤인 2022년 멕시코 여성과 낳은 혼외 자식(1990년생)이 알려져 뉴스가 된 적 있다. 작가의 가족들에겐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이달 출간된 소설 ‘8월에 만나요’는 반대다. 마르케스만 모르게 마르케스가 마지막 낳은 소설이 공식 입적되는 형국에서다. “절대 출간 말라”는 유지를 깨고 두 아들이 출간시킨 그의 유작. 출간 전부터 찬반 논란이 일었던 작품은 사후 10주기가 되는 올해 작가가 태어난 3월6일을 기해 전 세계 30개국에서 일제히 선보인다.

하나가 퍽 닮았다. 윌리엄 포크너를 스승 삼아온 마르케스가 소설 쓰게 된 계기로 또 꼽는 이가 프란츠 카프카다. 단편 ‘변신’ 덕택이다. “이런 내용을 써도 된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다면 오래 전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텐데.” 충격받은 이때 마르케스는 기자였다. 카프카 역시 동거녀에게 “불태우라” 했던 원고를 사후 친구가 발표한다. 단편 ‘단식 광대’, 미완의 소설 ‘성’ 등이 세계와 만나게 된 배경이다. 주목받지 못했던 카프카는 사후 비로소 카프카가 되었다.

‘8월에 만나요’가 정체를 드러낸 지는 20년도 넘는다. 여성 주인공의 다섯 편 옴니버스를 작가가 집필 중이라는 단독 보도가 나온 게 1999년 3월. 이듬달 소설 일부가 콜롬비아 시사 주간지 ‘캄비오’에 실린다. 같은 해 미국 주간지 ‘뉴요커’에 번역 소개도 된다. 하지만 2005년께 절필 선언을 할 때까지도 작품은 수면 아래였다. 2008년 ‘다섯번째 수정 중’이라는 ‘연애 소설’의 출판 예고 소식이 타전된다. 전후인 듯하다, 작가는 치매를 앓는다. 생을 먼저 ‘마감’한 2014년 4월17일까지다. 다음달 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재단은 고인의 의사에 따라 ‘8월에 만나요’는 출간하지 않기로 공식 발표한다. 아내 메르세데스 바르차 파르도(2020년 몰)의 최종 결정이었다. 이 과정에 담당 편집자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마르케스 연구자로도 이름 높은 작가 구스타보 아랑고의 지적이 대표적이다. 담당 편집자의 부정적 평가가 작가의 “소설 쓸 의욕을 잃”게 했고, 작품이 “성문에서 막 나오려는 순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미국 텍사스대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던 소설과 편집자 보고서 등을 열람한 아랑고는 출간 캠페인을 벌인다. ‘가보’답달까. (가보는 작가의 애칭이다) 이전의 마지막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 출간(2004)되기 전 최종 교정본이 해적판으로 보고타 시내를 나돌지 않았던가. 또 다른 ‘마지막’의 지난 10년이 평이할 리 없어 보인다.

지난 6일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문화센터 도서관에서 직원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가의 ‘8월에 만나요’를 진열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제 ‘소설의 시간’으로 들어가 보자. 남매 자녀를 둔 결혼 27년차 중상층의 여성 아나 막달레나 바흐. 마흔여섯 “가을에 접어든 어머니의 얼굴”과 몸이 원숙하다. 8월16일마다 교사였던 어머니의 무덤을 찾는다. 도시를 떠나 카리브해의 한 섬에 묻히겠다는 어머니를 가족은 납득 못 했다. 가난한 섬마을은 보기만 해도 울적하다. 게다 언덕 위 가장 초라한 공동묘지. 4시간 뱃길은 자체가 고행이다. 고급스런 꽃 글라디올러스를 어머니에게 바치는 바흐의 한여름 1박2일이 반복되길 다섯해가량. 교양 있는 음악가 남편과 자식 바라지로 생애의 ‘봄여름’을 보낸 바흐가 “이 세상에 혼자 있는 사람”처럼 제 욕망을 깨워 분출하는 순간들. 이 여정은 돌연하다. 섬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성들 상대로 “게걸스럽게” “짐승 같은 힘으로 형언할 수 없는 쾌락을 탐닉”한다. 남자가 “주도하게 놔두지 않”는다. 삼년째 남편은 의심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사실 여러 해 “집요한 바람둥이”질 않은가.

글라디올러스의 꽃말은 힘, 사랑에서 ‘밀회’까지 폭

넓다. 바흐의 ‘일탈’ 또한 “그녀 자신이 되”어 가는 하나의 기호일 뿐이다. 욕망을 직시하며 ‘나다움’(“다른 여자, 즉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에 이르려는 자의식의 한 자락이라 해도 좋겠다. 욕망과 자기검열, 쾌락과 죄의식 사이를 난생처음 배회하며 바흐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나이”, 즉 작고한 어머니의 나이 쉰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때껏 어머니(무덤)에 헌화해온 노신사의 존재를 알게 된다. 지난 다섯해의 일들이란, 자신과 마찬가지로 해마다 섬을 찾았던 어머니, 아마도 그 찰나 가장 순수한 욕망을 투사했을 “어머니의 짓궂은 장난”이던가. 바흐는 전율한다. 바흐는 제 “삶의 기적은 죽은 어머니의 삶을 계속하는 것이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소설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과 여러모로 교접한다. 죽음과 대치시켜 삶의 의미, 순수한 사랑과 욕망의 형상을 세공하되, 노년 남자와 중년 여자가 거침없이 제 입장을 현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카리브해 바랑키야에서 평생 ‘매춘’으로 사랑을 갈음한 아흔살 노인이 “가장 완전한 음악”의 작곡가로 여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지난 ‘사랑’을 부정해가는 중년의 아나 막달레나 바흐로 태어나는 격이다. “순정한 여자란 세상에 없다” 믿었던 남자의 변화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여자가 되는 건 치욕”이라 깨닫는 여자로의 변화와 대구를 또 이룬다. 섬에서 바흐에게 다가온 첫 남자는, 작가의 분신이라 할 노인의 사십대를 연상시킨다. 자연스레 성관계를 맺은 여인에게도 돈을 강제로 쥐여 준 노인. 바흐는 20달러는 남기고 떠난 그 남자를 경멸한다. ‘마술적 사실’은 카리브해의 8월로부터 온다. 노인에게 죽음을 감각시킨(죽진 않지만) 고귀한 달이요, 여인이 욕망을 감각한 달이다. 두 소설 가득한 책과 음악의 목록 또한 ‘마술’의 증거 아닐까. 이런 장치는 모두 작가가 침잠해온 삶 본연의 ‘고독’에 부치는 안부들 같다.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콜롬비아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2002년도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두 소설은 2002년 작가의 서재 서랍에 함께 파일로 들어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창작되면서 모색된 ‘대칭’인 셈이다. ‘내 슬픈…’은 작가의 전작들에 못 미치고, ‘8월에…’는 ‘내 슬픈…’에 못 미친다 평가받을 법하다. “노인들이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은 생의 승리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잊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따위 작가의 실제 삶이 응축된 통찰도 ‘8월에…’에선 덜해 보이는 탓. 다만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안간힘이 ‘8월에 만나요’다. 도덕적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내 슬픈…’과 출간 여부에 완결성 논란도 감수해야 할 ‘8월에…’는 서로를 ‘미러링’하면서 각기 소설은 물론 작가의 세계관도 더 입체화한다.

그럼에도 작가 살만 루슈디의 우려는 새길 만하다. “마르케스는 출간을 원치 않았다. 그는 치매를 앓는 동안 썼고, 나는 그 작품이 서점에 진열될 것이 심히 걱정된다. 그건 텍사스 대학교에 내가 널리 알리기를 원치 않는 몇몇 괴롭고 쓰라린 원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송병선 울산대 교수의 부언은 솔깃하다. 마르케스 작품을 충실히 번역하고 해석해온 이다. “자신의 문학 세계를 통일성 있게 마무리하는 작품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이 마지막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백년의 고독’의 마지막 장을 읽지 않고 건너뛰는 것과 같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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