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없는 진보정치가 민주주의 위기 불렀다” [책&생각]

고명섭 기자 2024. 3. 1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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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교수 ‘민주주의 위기’ 진단
“도구적 이성 뛰어넘는 영성이
한국 민주화‧진보운동 이끈 동력
전태일‧서준식의 영성 돌아봐야”

영성 없는 진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김상봉 지음 l 온뜰 l 1만 2000원

한국 민주주의가 죽어간다는 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나라 밖 기관(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조차 한국에서 독재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어쩌다가 우리 민주주의는 이렇게 된 것일까? 철학자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쓴 ‘영성 없는 진보’는 우리 진보 정치 진영의 ‘정신적 상황’, 특히 ‘영성의 상실’을 민주주의 위기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한다. 지난해 10월 경남대 K-민주주의연구소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을 대폭 보강한 책이다.

지은이가 한국 민주주의 위기를 ‘진보 진영’에서 찾는 이유는 먼저 이 책이 평생 진보 진영에서 활동해온 지은이 자신의 반성과 성찰을 담은 책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분화한 진보신당에 합류해 강령 기초 작업을 한 바 있다. 그런 경험을 포함해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 진보 정치를 겪으며 ‘영성의 부재’가 진보 정치를 실패로 이끌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둘째로 지은이가 진보 정치에 위기의 원인을 묻는 것은 “이 나라의 보수 정치에는 전체의 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정신 자체가 없으므로 믿음이나 영성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정부를 탄생시킨 이른바 ‘보수 세력’은 극복의 대상이기에 아예 논외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영성’이 문제인가?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영성, 좁혀서 말하면 ‘종교적 영성’이 이끌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영성은 ‘나와 전체, 나와 역사가 하나라는 믿음’을 뜻한다. 19세기 말의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이라는 종교적 영성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항쟁이었고, 3‧1운동도 믿음 깊은 종교인들이 대표로 참여해 이끈 거족적 항쟁이었다. “19세기 이래 다른 나라에서는 진보적 정치 행위가 세속주의에 의거하고 있었던 데 반해, 이 나라에서는 종교적 신앙이 혁명적 진보운동의 토양이 됐던 것”이야말로 한국 근현대 민중운동사의 고유한 특성이다.

지은이는 이마누엘 칸트의 구도를 빌려 지성과 이성과 영성을 구분함으로써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한다. 지성이 개별적인 사태를 이해하는 능력이라면, 이성은 전체를 사유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지성이 이해한 개별적 사태를 총괄해 전체를 모순 없이 일관성 있게 이해하는 능력이 이성이다. 그러나 이성은 그렇게 이해한 세계를 대상으로 앞에 세워놓는 관찰자일 뿐이어서, 그 자체로 ‘세계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의지는 내 안의 강렬한 욕구와 열망이 있어야만 발동한다.

관찰자로서 이성은 의지의 활동을 돕는 도구적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지의 방향이 잘못되면 이성은 악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근대 이성이 도구적인 것이 됐다고 비판했지만, 이성은 애초부터 도구성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성으로 파악한 세계 전체에 어떤 믿음을 싣느냐다. 그 믿음은 이성으로 규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영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다. 전체가 나와 하나라는 믿음, 그리고 그 전체의 역사가 뜻과 의미를 지녔다는 믿음은 오직 영성에서 얻을 수 있다.

지은이는 개인이 느끼는 고통에서부터 영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나의 한계는 고통의 한계다. 내가 고통을 느끼는 내 육체가 내 존재의 한계다. 그러나 나는 내 한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다. 그 타인의 고통에 내가 열리는 만큼 나의 존재는 확장되고, 마침내 세계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때 나와 세계는 하나가 된다. 영성이란 세계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고통받는 타인과 세계를 향한 응답이며, 이 응답의 다른 말이 사랑이다. 세계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라는 믿음에서 사랑이 피어난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어린 여공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렸다. 전태일의 영성적 자기희생은 1970년대 진보운동의 동력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 영성을 한국 진보운동의 중심에 세운 것이 바로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자신의 한쪽 눈을 팔아 착취 없는 사업장을 세우려 했고, 그 꿈이 좌절당하자 자신을 불사르는 희생으로써 그 고통을 세상에 알렸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전태일을 이끈 것은 고통받는 타인이 “나의 전체의 일부”이자 “나의 또 다른 나”라는 믿음이었다.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 진보 운동은 전태일의 영성적 자기희생을 동력으로 삼은 것이었다.

지은이가 주목하는 또 다른 사례는 1971년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돼 17년 동안 감옥생활을 한 서준식이다. 서준식의 ‘옥중서한’은 영성이 종교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생히 보여주는 텍스트다.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였던 서준식은 옥중에서 기독교 성서를 읽으면서 예수를 “소외되고 신음하는 세상 사람들의 해방을 바라는 자”의 모범으로 발견한다. 서준식에게 예수는 ‘사랑 없이 증오에 몰입하는 속류 혁명가’의 대척점에 선 인간이었다. “영원히 약자 편에 설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준 예수를 받아들임으로써 서준식은 ‘유물론적 영성’의 전범이 됐다.

옥중에서 유물론적 영성을 키운 서준식.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전태일과 서준식이 걸은 이 영성의 길은 1980년대 이후 혁명사상의 도래와 함께 “목적이 선하다는 확신이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을 무차별하게 정당화하는” 가치 전도의 늪에 빠졌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전체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 치우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높은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차이 속에서 적대적으로 분열한다.” 1980년대 이후의 진보 정치는 그렇게 영성을 잃어버리고 권력투쟁에 함몰되고 말았다.

지은이는 “역사에 대한 믿음, 전체에 대한 믿음 그리고 전체와 내가 하나라는 믿음”에 뿌리를 둔 “새로운 영성의 도래”를 열망한다. “오직 이 믿음 속에서만 우리는 세상의 고통 속에 자신을 던져넣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이 공허한 영성이 되지 않으려면 언제나 이성이 함께해야 한다. “역사의 의미를 묻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에 반대해서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멈추는 곳에서 더 멀리 나아가는 것, 아니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수난과 저항과 투쟁 속에서 형성해온 우리 자신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우리 영성의 알맹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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