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잊을 수 없는 이름

관리자 2024. 3. 1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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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름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깨닫게 해준다.

이름이 없을 때는 그냥 꽃이지만 장미·수선화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에 따른 정체성이 생기고 그 이름대로 살아가게 된다.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믿음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자식 이름을 잘 지으려고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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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는 이름 따라 운명도 변해
선조들 후손 작명에 정성들여
첫째 일병부터 아홉째 구병까지
아홉자녀 이름에 일련번호 매겨
가난 속 살림꾸린 진짜 애국자
나라 살릴 ‘삼순이·삼돌이’ 늘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름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깨닫게 해준다. 이름이 없을 때는 그냥 꽃이지만 장미·수선화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에 따른 정체성이 생기고 그 이름대로 살아가게 된다. 사람도 ‘똑똑이’라고 이름을 지으면 그렇게 살아가고 ‘얼간이’라고 지으면 그렇게 살아간다.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믿음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자식 이름을 잘 지으려고 애를 썼다.

나는 젊은 시절 공군에서 군 복무를 했다. 당시 천영성(千永星) 장군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분은 어려서부터 이름 때문에 공군에서 근무할 운명이고 장군이 될 거라고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천영성은 1000개의 영원한 별이라는 뜻이니 과연 공군 장성다운 이름이다. 이름 덕에 어려서부터 공군에 관심을 가져서인지 마침내 공군 장군이 됐다.

나는 KBS 라디오의 일일시사정보 프로그램을 약 7년간 했다. 그때 종종 출연했던 분이 황산성(黃山城) 장관이었다. 여느 여자이름과는 확연히 달랐다. 주변에서 최소 장관급 이상은 할 이름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불러주면 운명도 그렇게 변하는 모양이다. 이분은 국회의원도 하고 김영삼 정부에서 환경처 장관을 지냈다.

“저는 허당입니다.” 언젠가 모임에서 인사를 나누는데 이렇게 자기를 소개하는 분을 만났다. 농담기가 심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명함을 받아보니 진짜 허당(許堂)이었다. 한자로는 뜻도 좋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사람들이 ‘허당’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랐으니 난감한 일이다. 이분의 운명이 어찌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요즘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름이 있다. 가수 임영웅이다. 영웅이 임하셨다는 뜻이니 역시 영웅이 될 이름인가? 노래도 잘하지만 선행도 잘 베푸는 임영웅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왕별이다.

영원히 잊지 못할 이름이 있다. 철학자 윤구병(尹九炳) 교수다. 이분도 방송에 자주 모셔 내공 깊은 좋은 말씀을 들었다. 어느 날 이름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큰 형님은 일병, 둘째 형님은 이병, 셋째 형님은 삼병입니다. 저는 아홉째라서 구병이가 된 거지요.” “그럼, 넷째 형님은 사병, 다섯째 형님은 오병, 여섯째 형님은 육병인가요?” “맞습니다.”

부모님은 아들 아홉명을 낳으셨는데 처음부터 이리 많이 낳을 줄 아셨는지 일련번호로 이름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니 아들이 많아도 이름 헷갈릴 일은 없었다고 한다. 윤 교수는 정년이 되기 한참 전에 대학교수를 내던지고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고 있다. 책 보고 논쟁을 벌이는 곳에 철학이 있는 게 아니고 자연 속에 모든 진리가 있다는 신념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요즘 갑자기 윤 교수가 떠오른다. 무려 아홉형제다. 지금은 한명 낳는 것도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인구절벽 해결이 대한민국의 사활이 걸린 국가 의제가 됐다. 결혼하고 집 장만해 애 낳고 살림을 꾸리는 게 힘들어서라고 한다. 윤 교수 부모님이 살던 그 시절은 어땠을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게다가 전쟁으로 폐허 그 자체였다. 가난과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식 낳아 교육시키며 열심히 살아오신 선대들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은 선진국에 진입했다. 이분들이 진짜 애국자다. 이제 아홉명 낳아달라는 말은 하기 어렵지만 최소 세명은 낳아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살아난다. 구병까지는 아니어도 삼순이·삼돌이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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