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제 가노라”… 학전 문닫는 날, 김민기 위해 관객들도 떼창
어제 마지막 공연… 33년만에 문 닫아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학전블루 소극장. 167석을 빈틈없이 채운 관객들이 목이 터져라 곡 ‘아침이슬’을 합창했다. 무대 위 공연자들의 퇴장 후에도 박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1970년 탄생한 이 곡은 대중에겐 ‘가수 김민기’의 대표 수식어가 됐지만, 그 스스로에겐 “각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불렀기에 내 손을 떠난 노래”였다. 발표곡들이 ‘민주화 염원곡’으로 줄줄이 낙인찍히자 그는 농촌으로 향해 소작농살이를 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땐 벼 대신 사람을 키우겠다며 학전(學田)을 일궜다.
이날 ‘아침이슬’에는 ‘학전의 33년 역사의 끝을 장식한 노래’란 수식어가 더해졌다. 학전은 앞서 ‘설립 33주년 생일인 3월 15일에 문을 닫겠다’고 밝혔다. 공연 적자로 인한 경영난과 김민기 대표의 암 투병이 겹친 탓이다. 지난달 28일부터 ‘학전 출신’을 자임하는 33팀이 “학전의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남기겠다”며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열어왔다. 윤도현, 윤종신, 김현철, 장필순, 동물원, 나윤선, 설경구 등 학전을 거쳐간 굵직한 이름들이 무대를 꾸린 총 20회의 공연이 티켓 오픈 10분 만에 전석 매진됐다.
폐관 전 가장 마지막 인사를 전한 14일 오후 7시 무대는 약 2시간 반 동안 김민기의 곡만을 노래하는 ‘김민기 트리뷰트’로 꾸려졌다. ‘석별의 정’ 멜로디를 차용한 편곡으로 공연 첫 문을 연 ‘봉우리’부터 마지막 곡 ‘아침이슬’까지 객석은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출연진(박학기, 노찾사, 권병호, 권진원, 황정민, 알리, 정동하, 한영애)도 눈물을 꾹꾹 참는 얼굴로 ‘가을편지’ ‘아름다운 사람’ ‘백구’ ‘상록수’ 등 김민기의 맑고 서정적인 대표곡들을 나눠 불렀다.
곡 사이사이 저마다 ‘김민기의 학전’에 진 빚에 대한 일화가 이어졌다. 공연 첫 순서를 맡은 노찾사는 “1984년 우리 1집을 김민기 선배님이 만들어 주셨지만 어디서도 그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시절 ‘김민기’ 이름만 적혀도 정권의 검열 통과가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김광석 형이 공연하면 내가 나가 티켓도 팔고, 관객들에게 자리도 안내했다”며 학전에서 보낸 자신의 20대를 회상한 배우 황정민은 “(김민기 대표가) 늘 기본에 충실하라며 박자 세는 것부터 가르쳤다. 학전이 (영화) 작품을 하는 원동력이자 초심이 됐다”고 했다. 가수 한영애는 “김민기씨가 빨리 (암을) 털고 일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며 김민기의 육성 내레이션이 섞인 곡 ‘내 나라 내 겨레’를 열창해 큰 박수를 받았다.
지난 3주간 학전이 릴레이 공연을 펼치는 동안 김민기는 항암치료를 하느라 참석하지는 못했다. 대신 병원에서 매일 콘서트 녹화 영상을 전달받아 챙겨 봤다고 한다. 지난 11일 학전을 대표하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초연 배우인 재즈 가수 나윤선, 배우 설경구 등 총 70여 명의 학전 출신 배우들이 소극장 무대를 꽉 채운 가운데 김민기를 위해 감사패를 준비한 장면도 있었다. 당시 배경에는 학전을 거쳐간 780여 명의 제작진과 출연진의 이름이 엔딩 크레디트로 흘렀고, 일부 객석에선 울음이 터졌다. 가수 박학기는 “(김민기) 형님이 공연자들에게 자주 전화로 고마움을 표했다”고 했다.
학전은 이날 공연을 끝으로 당분간 ‘동숭동 1-79번지’의 이름으로 돌아간다. 지난 1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사업을 통해 학전 공간을 인수·재정비해 정체성을 계승하겠다’고 했지만, 김민기는 “학전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독자적인 공간으로 운영해 나가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이 공간을 임차해 명칭을 변경하고, 7~8월 재개관해 어린이·청소년 전문극장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매년 1월 김광석 기일에 맞춰 학전에서 열던 ‘김광석 노래상 경연대회’의 개최지 변경 여부도 아직 조율 중이다.
학전이 그간 시달려왔던 만성 적자는 이번 ‘학전, 어게인 콘서트’로 해소된 것으로 전해졌다. 출연진 전원이 출연료를 받지 않았고, 티켓 수익금 전액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김민기의 학전은 이제 세상에 진 물질적 빚을 청산하고 홀가분해졌다. 하지만 학전에 진 대중문화계의 빚도 과연 함께 사라진 것일까. ‘돈 안 되지만 가치 있는 공연’을 해왔던 학전과 김민기의 행보는 한때 세간의 이해를 얻기 어려운 행동처럼 비쳤다. 학전의 복도 문짝을 떼어 관객을 받을 만큼 흥행했던 김광석 콘서트를 ‘너무 잘되니 그만할 때가 됐다’며 종료했고, 누적 공연 4000회를 넘길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지하철 1호선’은 적자 경영의 주원인이 된 아동극을 하기 위해 2008년부터 10년간 공연을 멈췄다. 하지만 그가 뿌린 인재의 씨앗은 우리 문화계 구석구석으로 날아가 이름을 새겼다. 학전의 마지막 인사에 동참한 출연진이 “‘학전’은 사라져도 그 DNA는 영원할 것”(배우 설경구)이란 외침에 고개를 끄덕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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