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웨딩 메뉴판’엔 가격이 없다

강우량 기자 2024. 3. 1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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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 웨딩거리의 웨딩드레스 판매점 모습./연합뉴스

당사자가 되어보니 절감하고 있다. 3개월 후 아내가 될 여자 친구에게 웨딩드레스 가봉(假縫) 일정을 묻자, 엉뚱하게도 “이제 드레스에 돈 더 안 쓰는 게 목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미 드레스 대여비는 정산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가봉할 때 디자인을 수정하거나 장식을 추가할 때마다 추가금이 붙는다는 것이다. 드레스 색깔만 조금 바꿔도 30만원을 더 내야 한다는 말에는 겁부터 났다. 정작 드레스 대여 계약을 맺을 때까지만 해도 ‘대여 따로, 가공 따로’라는 서비스 요금 안내는 없었다. 애초에 드레스숍에서 웨딩드레스 목록을 살펴볼 때부터 가격은 적혀있지 않았다.

가격은 현실이다. 식당 메뉴판에서 정말 맛있어 보이는 음식 사진에 끌려도, 옆에 적힌 가격이 비싸면 고민한다. 소비자가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합리적으로 선택하려면, 일단 둘 다 눈에 볼 수 있어야 하는 게 기본 전제다.

결혼을 준비하며 접하는 웨딩 서비스는 대부분 현실(가격)을 가린 채 욕망만 자극한다. 영국에서 들여온 최고급 섬유 원단을 만져 보라고 한 뒤, “이걸로 신랑 예복을 만들려면 200만원은 들지만, 오늘만 특별히 120만원에 해주겠다”고 유혹한다. 정가의 40%를 단숨에 깎아주는 서비스가 정상적이냐는 의구심이 아니었다면, 나는 홀린 듯 거금을 지불했을 것이다.

드레스와 예복뿐 아니다. 결혼식 당일 오전 8시 전에 메이크업을 받으면 5만5000원을 추가로 내야 한다. 헬퍼(도우미) 이모님을 25만원에 고용했지만, 퇴근할 때 교통비는 따로 드려야 한다. 지난해 결혼한 친구 한 명은 “스드메(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대여, 메이크업) 각각의 가격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데다, 뭐만 하면 추가금이 붙는데 예산을 짜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고 했다.

현실의 눈가리개를 강요당한 소비자들은 ‘호구’가 된다. 주는 사람 마음대로 서비스가 바뀌니, 잘 부탁한다고 굽신거릴 수밖에 없다. 한 결혼 선배는 “드레스 피팅비 5만원은 ‘예쁜 옷 입혀줘서 감사하다’고 적힌 봉투에 넣었고, 스튜디오 촬영을 갈 때는 도시락까지 준비해 갔다”고 했다.

심지어 드레스 입은 신부의 모습을 찍으려 하면, ‘디자인 도용 우려가 있다’며 제지당한다. 예비 신혼부부들은 가격이 안 적힌 메뉴판을 받아 든 것도 서러운데, 가게 주인 눈치까지 봐가며 어렵게 모은 신혼 자금을 꺼내야 한다.

결혼식은 요즘 청년들의 허영심이 만든 문화라는 비판도 있다. 그런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욕심도 현실이 가려져 있으니 부리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격표만 제대로 붙어 있어도, 소비자들은 지출을 관리하고 조절할 수 있다. 정부에서 웨딩 서비스 가격을 공개하도록 의무화하는 정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가격 적힌 ‘웨딩 메뉴판’은 예비 신랑·신부의 기본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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