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정치의 함정
국민 위해 세금 쓰는 정치인, 선거와 투표 통해 발굴해야
유일선 한국해양대 명예교수
감세 정책이나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등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TV 토론회에 정치가가 참여하면 논쟁의 열기가 격해진다. 모든 주장이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총선이 다가오자 ‘민생토론회’ 이름 아래 대통령은 지역개발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1월 4일 경기 용인에서 발표한 공매도 금지 조치를 필두로, 고양과 울산에선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를, 의정부에선 수도권 광역교통철도(GTX)를, 부산에선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 제정을, 대전에선 충청권 광역급행철도 조기착공 문제를, 창원에선 원전 투자 확대를 언급했다.
한편에서는 이것은 공무원의 선거관여금지 위반(공직선거법 제85조 1항)이고, 900조 원이 넘는 돈이 필요한데 2024년 예산규모가 656조 6000억 원인 나라에서 가능한가, 그리고 관련법 통과에 야당 협조를 받아 해낼 수 있을까라며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대통령실은 민생을 챙기는 것은 대통령의 임무이므로 선거와 무관하다, 또 예산은 정부재정과 민간투자를 구분하지 못한 오해이며 중앙재정 투입은 10% 미만으로 본다고 항변하고 있다. 누구 말이 옳을까?
오늘도 그들은 의정활동이나 선거유세 등 정치현장에서 정치의 이름으로 때론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때론 공격적인 언어들을 동원하면서 상대방을 저격한다. 오직 자신들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신념 아래 공적 임무를 부여해 준 주권자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성전’을 치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국민을 자신들의 전쟁 승리를 위해 동원해야 하는 수단쯤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안전과 번영을 위해 주요 상황과 정책의 효과를 여러 시각에서 차분히 분석하고 타협과 협력을 통해 적절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는 사이 지난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석유 파동과 외환위기,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고 가장 낮은 1.4%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래서 남의 일이라고 퉁치기엔 그들이 우리의 미래가 걸린 기후문제, 세계질서변화, 민생문제와 남북문제 등에 관련된 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당장은 나와 상관없는 일 같지만, 승패에 매몰된 정치환경에서 이루어진 결정이 사회의 안전, 기업활동, 일자리와 노후생활 등 우리 현재와 미래의 삶을 위협하기 때문에 두렵다.
왜 우리는 자주 이런 정치적 함정에 빠질까? 우리의 삶은 늘 두 차원의 선택에 직면한다. 하나는 개인적 차원에서 선택이다. 즉 ‘내 돈을 나를 위해 쓰기’ 위한 선택이다. 우리는 어떻게 돈을 벌고 그 돈을 어떻게 나를 위해 쓸 것인지, 여러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여 의사결정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므로 결과에 대해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설령 흥청망청 쓴다 해도 사회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 유일한 자신이므로 그것을 감당하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적 차원에서 공공선택이다. 개인의 선택으로 감당할 수 없는 국방 치안 교육 고속도로와 항만 등 우리 삶의 질적 가치를 결정하는 공공재에 대해 누군가가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정치학자 이스턴은 이런 과정을 정치, 즉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하였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국민 각자는 세금의 명목으로 갹출하여 기금(예산)을 마련하고 대리인(정치인)을 선출하여 공공선택에 대한 의사결정을 위임한다. 따라서 정치는 ‘남의 돈을 가지고 남을 위해 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정치인은 자신들이 직접 번 돈도 아니기 때문에 돈을 아껴 쓸 이유가 없다. 또한 남의 돈을 가지고 자신의 권한과 이익을 위해 사용할 유인이 상당히 크다. 국민 각자는 자신의 일상생활로 바빠 공공선택 문제에 굳이 꼼꼼하게 따져보길 꺼리고 있다 하더라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툼의 소지가 많아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치인을 평가할 수 있는 ‘결정적 무기’는 선거인데 개인의 지분은 4400만분의 1에 불과할 만큼 미약하다.
이런 조건 하에서 정치인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겠는가? 다수의 표만 얻으면 되니까, ‘남(국민)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이득을 쟁취하기 위해 선거를 ‘전쟁화’함으로써 국민을 피아(彼我)로 분리하고 일부를 배제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타협과 협력의 공간이 축소되고 갈등과 분열의 공간은 확대된다. 그리고 승자는 이것을 또 다른 권력 강화의 빌미로 삼는다. 장자크 루소는 국민은 “선거 때만 주인이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로 전락한다”면서 대의민주주의의 정치적 함정을 지적했다. 미미한 지분을 갖는 우리지만 주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돈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쓰는’ 정치인을 선거를 통해 발굴해내야 한다. 이러한 작은 행동들을 수많은 사람이 함께 할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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