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사람 살류!
풀브라이트 방문학자로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에 체류하던 10년 전, 틈틈이 인근의 인디언 보호 구역들을 답사하던 중 세미놀 국립박물관에서 가슴 뭉클한 자료를 접했다. ‘추가 표현들(Additional Expressions)’이란 제목의 문서. “I’m hungry→See-jang HAHM-nee-dah/ I’m thirsty→MAWG mah-ROOM-nee-dah/ Help!→SAH-rahm-SAHL-l’yoo.” 소리 내어 읽으면 ‘시장합니다’, ‘목마릅니다’, ‘사람살류’가 되지 않는가. 일부 내용만으로도 문서 전체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6·25 전쟁 당시 위급 상황에 처한 미군 병사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생존 한국어’ 가이드였을 것이다. 그것이 소통에 얼마나 도움 되었을지 궁금하고, 모든 게 열악하던 당시 병사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짠하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한국 땅을 밟을 이유도, 도막말들이나마 한국어를 익힐 필요도 없었을 그들이었다.
포연에 휩싸였던 74년 전의 이 땅. 미국을 비롯한 16개 우방국들은 자국의 젊은이들을 ‘등 떠밀어’ 보내주었다. 당시 미국 정부나 부모들은 시계(視界) 제로의 싸움터에서 자신의 아들들이 살아 돌아올 확률을 몇 퍼센트로 보았을까. 젊은이들을 사지로 보내며 목마르고, 피곤하고, 아프고,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의사표시를 해야 하는지 알려줄 최소한의 가이드라도 안겨주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리라.
최근 S전자는 놀라운 발표를 했다. AI 기술을 활용한 프리미엄 폰의 첫 모델을 출시한다는데, 실시간 통역, 메시지 번역 등 ‘소통’이 그 핵심 기능이다. 상대방의 단말기나 통신사에 구애받지 않고, 13개 주요 언어들 간의 통역을 통화 중에 지원한다는 것. 문장 스타일을 바꾸거나 철자 혹은 문법의 오류도 수정해 준다니, ‘바벨탑’의 슬픈 역사를 극복하는 선봉에 자랑스럽게도 우리가 서게 된 것이다.
전화기만 켜면 통역이 되는 지금. 배고픈 미군 병사가 꼬깃꼬깃 접은 종이쪽을 펼쳐보며 ‘시-장-합-니-다’라고 점찍듯 호소했을 그 시절로부터 74년이나 흘렀다. 낭만 아닌 기적의 시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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