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커피하우스] 총선 판의 정치인들 험한 말… 국민 가슴은 멍든다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2024. 3.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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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륜 공천’ ‘비명횡사 공천’ ‘몽둥이로 때려야’…
더럽고 거친 말들 전장의 총알처럼 날아다녀
상대방 공격 위해 온갖 신조어… 천박한 은어도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따뜻한 솜과 같지만
잘못 사용하면 가시·칼·도끼가 돼 사람 해쳐
나는 말 곱게 하는 사람에게 한 표 보태겠다
일러스트=이철원

톨스토이가 그랬던가.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정당이 선거에 나설 후보를 공식 지명하는 ‘공천’에 이렇게 많은 색깔과 이름이 있는 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자기 당 후보 공천이나 잘하면 될 일이지, 남의 당 공천이 잘못되었다며 비난하는 데 온 힘을 다해 다채로운 표현을 동원하며 애를 쓰는데, 그 열과 성이 감탄스러울 정도다.

평범하고 나른한 일상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할 험한 말이 마치 전장의 총알처럼 허공을 가르는 총선판을 보며 내가 서글퍼지는 건 무슨 이치인지 모르겠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전장의 총알이다. 바로 이재명의 야당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방탄 국회고, 자신을 보호해줄 총알들을 구비하고자 하는 공천 아니겠는가. 국회의원 배지라면 총알받이라도 감지덕지할 사람들이 줄을 서서 달려들고 있으니 이재명 대표만 탓할 일도 아니다. 그는 한 생명체로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죽지 않고 살아 남으려는 본능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모름지기 선거라면 적당히 정책도 있고, 이슈도 있고, 약간 철학도 보이고, 그러고도 매력 있는 몇몇 후보 중에서 고르는 최소한의 재미가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지금 총선 정국에서는 전장의 포연에 가려 정책도, 이슈도, 매력적 인간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하나같이 색깔 점퍼 속에 개인을 감추고, 복잡한 정책보다 화끈한 선심성 공약과 가식적 웃음을 띤, 정체 모호한 인물들이 국민의 선택을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수십 센티는 될 투표용지에는 생전 듣지도 못한 정당 이름이 그득할 것이고, 내가 찍은 표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또다시 22대 국회에 입성하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과정은 지루하고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 좋은 음악도 다 못 듣는 세상에서 더럽고 거친 정치인의 말을 귓전에 달고 투표장으로 가야 하는 유권자들은 가슴에 멍이 든다. 내가 진짜 이 나라 주권의 원천이라는 국민이 맞기는 하는 걸까.

누구의 창작인지, 운율과 자구와 의미가 딱 들어맞는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말로 요약되는 자당의 공천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며칠 전 국민의 힘을 향해 ‘패륜 공천’ ‘친일 공천’ ‘극우 공천’ ‘돈봉투 공천’이라는 말로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이런 패륜 정권은 몽둥이로 때려야 한다”고 했다. 이재명 대표는 모를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유권자들이 몽둥이로 얻어맞은 기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지 정당과 관계없이 심하고 거친 막말은 듣는 사람을 불쾌하고 초라하게 만든다.

그런 막말에 침묵할 수 없는 여당도 ‘패륜이라면 너의 특기’라는 취지로 받아치고, ‘친일 공천’에는 ‘일제 샴푸 법카 의혹’으로 대응하며 ‘귀틀막 공천의 진수’ ‘비명횡사 공천의 끝판왕’이라며 받아쳤다. 적어도 그들 표현대로라면 이번 총선은 무늬만 다른 ‘패륜 공천’ 정당들 사이의 싸움이다. 이런 패륜 집단들 속에서 우리의 선량을 찾아내야 하는 유권자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명심보감의 ‘언어 편’에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따뜻하기가 솜과 같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말은 날카롭기가 가시와 같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한마디 말로 사람을 이롭게 함에 소중함이 천금의 값어치요 한마디 말로 사람을 상함에 아프기가 칼로 베는 것과 같다’는 말이 뒤따른다.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바로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편안하다’는 말도 있다. 말은 마음을 감싸는 솜이 될 수도 있으나, 잘못 사용하면 가시, 칼, 도끼가 되어 사람을 찌르고 죽일 수 있다는 말이다.

서양의 수사학에서도 말은 ‘꽃과 칼’의 양면으로 묘사한다. 16세기 독일의 그레고리 라이히가 남긴 목판화에서 ‘수사학의 여인’은 입의 한 끝에는 향기로운 백합을, 또 다른 끝에는 칼을 물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말이란 그렇게 향기로울 수도, 치명적일 수도 있다.

부모의 막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며, 걱정과 슬픔과 스트레스로 정신 건강이 위협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말을 험하게 하는 사람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자신의 힘과 자신감을 과시하고 주위를 조정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하는 짓이 딱 그거다.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라면 온갖 신조어를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뒷골목에서나 쓰는 천박한 은어도 마다하지 않는다. 철 지난 ‘독재 타도’를 출마의 변으로 삼으며 멀쩡한 대통령 임기를 조기 종식시키겠다는 후보도 있다. 시대착오적이며 위험한 언행을 일삼는 해로운 정치인이 세상에 뿌리는 그런 말을 일상으로 듣고 사는 국민의 정신 건강이 위험하다.

한 달도 남지 않은 총선 열기가 달아오르며 더욱 거칠고 뾰족해진 정치 언어 틈에서 가슴은 멍들고 마음은 상했지만, 전장의 연기를 헤치고 투표장에 가려고 한다. 더러운 평화보다 더 더러운 말의 전쟁을 막으려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런다. 솜처럼, 백합처럼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국민을 칼과 도끼로 내리찍는 사람이 당선되어 국민의 정신 건강을 해치는 일은 막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나는 무조건 말 곱게 하는 사람 편에 나의 보잘것없는 한 표를 보태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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