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 돌고 나니] 마음의 눈으로 보라

이주연 산마루교회 목사 2024. 3. 1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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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눈. /이주연

평창 공동체의 아침, 장작이 타고 있다.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간다. 우린 일손을 놓고,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3면의 통유리창 밖을 보고 앉았다. 고요 속에, 스펙터클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창조주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는 감탄이 우리 가슴에서도 터졌다. 이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호강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하셨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나는 “박대성 화백의 눈 덮인 소나무와 불국사를 보러 전시회에 가자”고 했다. 우리는 10미터가 넘는 화폭 앞에 섰다. 작품엔 평창 산중에 쏟아지던 눈이, 고요히 환하게 앉아 있었다. 먹빛은 태곳적 흑암과 방금 내린 듯한 흰 눈의 대비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곁엔 수백 년 뒤틀려 자란 매화가 걸려 있었다. 숯빛 갈필로 거칠게 그려냈다. 환란을 이겨낸 작가의 인생 스토리 같다. 그는 다섯 살 적 빨치산의 낫에 부모를 잃고, 자기 한쪽 팔마저 잘렸다. 그리하여 어린 날 따돌림으로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운명적으로 붓을 잡고, 외로이 자기 방에 머물렀다. 학교마저 못 다녀 중졸이다. 학연이 없어 화단의 냉대까지 견뎌야 했다. 그러나 매화꽃 뒤로 환한 둥근 달이 뜨고, 꽃잎이 허공을 타고 내린다. 매화 아래 하늘색 연못엔, 거위가 둥둥 떠있다. 시련을 이겨내고, 동심에 이른 것이리라!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 화백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수년 전, 그는 20미터나 되는 작품을 전시했다. 통일신라 명필 김생의 작품을 모필한 것이다. 동양화는 화(畵)에 앞서 서(書)가 중요하기에, 평생 서법을 익혀 왔다는 뜻이리라. 1억원이 넘는 작품! 그런데 아이들이 작품 위에서 미끄럼을 탔다. 어찌 되었겠나! 그러나 화백은 “아무 문제도 삼지 말라. 어린아이이니. 훼손된 것도 작품의 역사”라 했다. 그도 어린 시절 병풍에 낙서하다 그림에 불이 붙었다 한다. 이 때문에 그는 아이들이 실수한다고 야단하지 말고, 자기대로 자라게 두라고 했다. 이 또한 화백의 동심의 발현이리라!

그는 “마음에 거리낌 없이 그린다”고 한다. 그러려면 얼마나 피땀 흘려 서법을 익혔을까? 술(術)이 자유자재함에 이른 후, 오직 순수함으로 작품을 한다는 것이니! 이렇게 우리도 각자의 세상을 짓는다면 어떨까?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오늘은 어린 손자손녀와 놀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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