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마을 흩어지는 공동체Ⅱ] 3. 소양동의 위기

오세현 2024. 3. 1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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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로 돈 쓸어 담던 양키시장, 세월에 장사 없는 빛바랜 영광
30년 전 양키시장 외국 상품 판매 인기
중앙시장 호황에 서부·요선시장 위축
후평·석사·퇴계동에 아파트 집중
10년 간 소양동 인구 7666명 줄어
수십 년 자리 지켜온 상점 문 닫기 시작
“어르신 돌아가시고 빈집 많아 문제”

캠프페이지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소양동의 변화가 감지됐다. 인근 중앙시장은 서부시장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고 후평동과 퇴계동, 석사동을 중심으로 아파트 건립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2005년 캠프페이지 철수는 소양동에 직격탄을 안겼다.
 

▲ 1980년대 서부시장. 한때는 춘천의 대표 시장이었으나 중앙시장 확장과 맞물리면서 위축됐다. 사진제공=춘천문화원

■양키시장의 흥망성쇠

캠프페이지는 당시 새로운 문화와 물건이 유입되는 통로였다. 사람들은 군부대를 통해 들어온 물건들을 팔기 시작했고, 그게 양키시장의 시초가 됐다. 당시로서는 접하기 힘든 초콜릿, 양주를 양키시장에서는 만날 수 있으니 언제나 사람이 들끓었다. 중앙시장 자체가 호황이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몇 개 남지 않은 양키시장을 지키고 있는 조숙현(68)씨는 “30년 전만 해도 ‘돈을 쓸어 담았다’고 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며 “카드를 쓰던 때도 아니니 하루 매출을 자루포대에 담아서 가져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방모(70)씨는 “춘천 양키시장은 1960년대, 70년대 중앙시장의 명물”이라며 “장사가 잘 된다고 소문이 나니까 전국에서 장사꾼이 몰려들었고 앞 사람 머리만 보고 가기 바빴다. 미군들이 있을 때니까 그들이 쓰던 물건을 몰래 받아서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이어 “군복도 팔고 군복에 붙이는 배지도 가판대에 내놓았다”며 “이것저것 안 파는 물건이 없었다”고 했다. 박모(61)씨도 “미군들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다 보니 군수품이나 잡화 중심의 시장이 만들어졌다”며 “그때는 ‘총이랑 탱크빼고는 다 있다’고 할 정도로 외제가 많았다”고 했다. 김모(59)씨 역시 “외국 상품 판매를 허가받지 않을 때였는데 여기 와야지만 외제 물건을 구경할 수 있었다”며 “물건은 주로 미군에서 많이 떼왔다”고 했다. 중앙시장의 성장은 서부시장과 요선시장의 위축을 뜻하기도 했다.

김흥우(67) 소양동 통장은 “지금은 명동이 중앙시장 쪽이지만 예전에는 이 동네(소양동)가 명동이었다”며 “춘천에서 술을 마신다고 하면 다 이 동네로 왔었다. 도청, 시청, 군청에서 중요한 사람들이 다 여기로 와서 술도 마셨다”고 했다. 이어 “번화가였던 동네가 명동으로 넘어갔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양키시장은 이제 손에 꼽을 정도로 점포가 줄었고 시장의 침체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다. 중앙시장 상인인 A(64)씨는 “한창 때는 중앙시장 아니면 장을 못 볼 정도였다”며 “지금은 어느 길목은 사람이 없어 무서워 가지도 못한다”고 했다.

▲ 춘천 양키시장은 캠프페이지 주둔의 상징이다. 당시로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외국 물건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양키시장이었다. 지금도 몇 개 점포가 남아 양키시장의 맥을 잇고 있다. 양유근

■후평동·퇴계동·석사동 등장

신흥 주거단지의 등장도 소양동의 변화를 초래했다. 후평동을 중심으로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사람들은 후평동으로 쏠렸다.

춘천학연구소가 펴낸 ‘춘천동지-소양동’을 보면 1976년 봉의아파트를 시작으로 에리트·세경·현대·한신·주공이 잇따라 들어섰다.

1990년 10월 후평 현대 3차가 준공되는 시기까지 약 14년 간 아파트 건설이 이어졌다.

이 기간 후평동에 지어진 아파트만 모두 19개, 6758세대에 달한다. 1990년대부터는 신도심 확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석사동과 퇴계동의 시대가 열렸다. 2000년 기준 춘천에는 86개 아파트가 건립됐는데 이 중 소양동에 들어선 아파트는 1개에 불과하고 66%는 후평·석사·퇴계동에 집중됐다.

1985년 1만7393명이던 소양동 인구는 1995년 9727명으로 7666명이 줄었다. 같은 기간 후평동은 3만114명에서 5만9349명으로 2만9235명이, 석사동은 4032명에서 1만4111명으로 1만79명이 늘었다.

8696명이던 퇴계동 인구는 2만2508명으로 1만3812명 증가했다. 소양동의 공동화 현상이 시작된 셈이다.

▲ 김흥우 소양동 통장

■문 닫기 시작하는 상점들

1990년 중반부터 인구가 빠져나간 소양동은 2005년 캠프페이지 철수 이후 이렇다 할 회생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수십년째 소양동을 지켜 온 토박이들도 이제 하나, 둘 지역을 떠나려 한다. 37년을 운영한 한 철학관은 정리 작업이 한창이다. 해당 철학관 관계자는 “지금은 앞에 도로가 있지만 예전에는 문 앞에만 나가도 집들이 가깝게 붙어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 불러서 커피도 마시고 해장도 하던 동네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소양동을 ‘죽어가는 동네’라고 표현했다. 그는 “서부시장, 요선시장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꼭 소양동을 지나갔다”며 “동네에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다 돌아가시고 나 혼자 남아서 철학관을 정리하려 한다. 지하상가가면 타로를 저렴한 가격으로 싸게 본다고 하는데 여기까지 올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했다. 그래도 소양동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해당 관계자는 “위치가 참 좋고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다”며 “정겨운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동네가 죽어버렸다”고 한탄했다. 양복점 세종라사도 이제 더이상 영업할 계획이 없다. 한때는 직원들 5명을 데리고 도청, 시청 공무원들과 교사들 양복을 도맡았는데 모두 옛 일이 됐다. 그래도 그렇게 벌어서 아들, 딸 모두 대학까지 마쳤다. 장연태(75)씨는 “예전에는 난장시장도 있고 술집에 순댓국집까지 별의별 게 다 있었다”며 “좌판 시장도 넘쳐났었는데 이제 다 흩어져버렸고 여기에 사는 건 나 하나”라고 했다. 이어 “옛날에 서부시장이라고 하면 큰 시장이라 다 알아줬는데 이제는 조그마한 가게 몇 개 남아있다”며 “동네가 삭막해졌다”고 했다.

▲ 장연태 세종라사 주인

떡집을 운영하는 유성영(66)씨는 “몇 년 사이에 시대가 바뀌어서 떡을 머리에 이고 오는 노인들이 없다”며 “다 돌아가시거나 요양병원으로 가셨다. 가래떡 하러도 안 오신다”고 했다. 명절 대목은 옛 말이 된 지 오래다. 그는 “4~5년 전만 해도 조금씩이라도 떡을 하러 오시는 분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대목이라는 게 완전히 사라졌다”고 했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B씨도 “빈집이 많아 문제”라며 “건너편, 옆집 전부 다 빈집이고 나이가 드셔서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며 “지역이 크지 않아서 뭐가 들어오기가 힘들다”고 했다. 거센 세파에도 소양동은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김흥우 통장은 “예전에 소양동 여관에서 묵었던 손님들이 이 동네를 찾아온다”며 “‘당시 숙소는 없어졌다’고 대답하는데 그 분들이 이 동네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한다. 서울로 이사간 친구들도 이 동네는 내가 살던 모습 그대로라고 말한다. 여기는 변하지 않는다. 건물이 사라지고 모습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라고 했다. 오세현·양유근·이정호·이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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