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좌파 학계, 18년 전부터 이승만을 일부 인정했다?

유석재 기자 2024. 3. 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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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선거와 토지개혁 긍정 평가... “분단의 유일한 책임자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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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 ‘건국전쟁’으로 대표되는 이승만 재평가 운동에 대해 신선하다고 느끼는 분이 많습니다. ‘분단의 책임자’이자 ‘독재자’로만 매도되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자유민주주의의 건설자’ ‘장기 평화 수립자’로 다시 보는 것입니다. 세월이 이만큼 흐르고 나니 이제서야 이승만의 그때 그 선택이 옳았다고 깨닫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동안 소위 ‘진보’라고 칭해지는 좌파 학계에서는 이승만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기만 했던 걸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이승만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조차 이승만의 움직일수 없는 업적만큼은 일부 인정하는 일이 대략 2000년대 중반인 2006~2007년부터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이들은 이승만의 어떤 부분을 인정했던 것이었을까요.

시계를 되돌려 2006년으로 돌아가보면, 이때 좌파 역사학계의 대표적인 인물과도 같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가 ‘이승만과 제1공화국’이란 연구서를 썼습니다. 그는 이승만 정부를 비판적으로 서술하면서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1948년 5·10 선거는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보통선거였다.

=1950년의 농지개혁은 지주 계급을 소멸시키고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길을 열어 놓은 개혁이었다.

한동훈 같은 사람이 농지개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때문에 정치적 공격을 받기기 훨씬 이전에, 이미 서중석이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 해인 2008년에 이른바 ‘진보적’ 계간 학술지인 ‘역사비평’ 83호가 출간됐습니다. 이 책은 특집으로 ‘이승만과 제1공화국-분단과 건국의 담론을 넘어’를 마련했습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성보 연세대 교수 ‘탈분단 시대에 돌아보는 건국 시기 남북의 지향점과 상호 경쟁’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보는 ‘건국의 담론’과 ‘분단 책임자’로 보는 ‘분단의 담론’에서 모두 벗어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대통령 개인이나 행정부가 아니라 국회와 헌법을 통해 표현되는데,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조화시킨 것이었다.

=제헌헌법은 기본권의 광범위한 보장, 3권 분립을 통한 권력간 견제와 균형, 사법권 독립, 지방자치 등 근대 민주주의 헌법이 갖춰야 할 사항을 고루 담았다. 또 토지개혁과 반민족행위자 처벌의 근거 조항을 둬 새로 출범하는 국가를 근대적·민족적으로 구성하겠다는 국민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대 집권층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일방적으로 주장했을 뿐 헌법 정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평화 공존과 장기적 통일의 전망을 모색해야 하는 지금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제헌헌법에서 다시 찾아야 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이승만의 한국문제·동아시아·국제관계 인식과 구상’

=이승만의 ‘악마화’와 ‘신화화’의 두 편향 모두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1904년부터 1960년까지 56년 동안 한국 외교의 중심에 있었던 이승만은 미국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면서 한국 문제를 전통적인 ‘중국 중심 질서’와 ‘중·일 갈등 구조’라는 동아시아 구도로부터 탈출시켰다. 그래서 한국 문제를 사상 처음으로 명실상부한 국제 문제로 만든 점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

=남북 분단의 과정에서 북한과 공산주의자들이 종전 직후부터 분단의 길을 지속했음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특히 분단 질서 고착에 관해 일방적으로 이승만의 책임을 묻는 것은, 역사 기록들이 보여주고 있듯 실제 사실과 다르다. 북한은 선제적으로 체제를 구축했고, 김구 역시 (단독) 국가 수립을 추구하다 막판에 (통일 정부로) 전향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완강한 반공·반북주의로 인해 민족을 우회해 민족 문제를 풀려 했던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정진아 성균관대 연구교수 ‘이승만 정권의 자립경제론, 그 지향과 현실’

=이승만 정부의 경제정책은 노동자·농민을 희생하고 대기업을 육성하며 원조에 의존하는 반민중적·대미의존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나 일본 경제에 수직적으로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한국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자립적인 성격이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

▶한봉석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4H운동과 1950년대 농촌 청소년의 동원 문제’

=1950년대의 4H클럽 운동은 이승만 정권에 의한 동원의 매개체인 동시에 청소년들이 ‘민주 시민’으로 성장하는 근대 문화의 공간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최근 10여 년 동안 좌파 진영 내에서도 항상 목소리를 높여 이승만을 매도했던 사람들은 학자라기보다는 운동가, 다큐 제작자, 학원강사, 유튜버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황당하게도 이승만을 ‘친일파’ ‘반역자’로 몰았던 민족문제연구소의 2013년 다큐 ‘백년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좌파 진영이라도 진지한 학자의 눈에 이승만의 긍정적인 업적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얼마 전 연구서 ‘1945년 해방 직후사’를 낸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를 인터뷰했을 때였습니다. 우파 학계의 해석과는 달리 이승만이 미 군정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였다고 본 그는 책에서 이승만에 대해 ‘대단히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고 썼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이승만을 비난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인에게 권력욕이 강하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정 교수는 ‘이승만을 종이호랑이 정도로 생각하고 이용하려 했다가 정부 수립 뒤 배척당하고 이후 이승만의 적대 세력인 야당이 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던 세력, 바로 한민당 세력에 대해 비판할 부분이 많아 보였습니다. 정 교수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당 세력이 1961년 5·16 때 소수 병력의 정변만으로도 권력을 잃고 말았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권력 의지의 부재(不在)였다.’

지금 대놓고 영화 ‘건국전쟁’을 비판하면서 이승만을 매도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들 중 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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