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길을 잃은 순간 ‘침묵’에 귀 기울여 보라[책과 삶]
샤이닝
욘 포세 지음 | 손화수 옮김
문학동네 | 120쪽 | 1만3500원
어느 초겨울 저녁, 삶이 지루한 한 남자가 무작정 차를 몰고 나간다. 내키는 대로 차를 몰던 남자는 깊은 숲속으로 접어들고, 길바닥에 차가 처박혀 고립되고 만다. 날은 어두워지고, 눈까지 쏟아진다. 지루함이 공허감으로, 다음엔 두려움으로 변해간다.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해 숲길을 나서지만 어둠 속에 길을 잃고 만다. 피로와 추위, 배고픔 속에 방황하던 남자는 순백색의 빛나는 존재, 어머니와 아버지, 검은색 양복을 입은 맨발의 남자를 만나며 불가해한 일들을 경험한다.
2023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욘 포세가 데뷔 40주년이 되던 지난해 발표한 소설 <샤이닝>의 대략적 내용이다. 남자가 숲속에서 길을 잃고 하염없이 헤매는 단순한 이야기다. 포세는 오로지 남자의 독백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삶의 진실이 함축된 시적인 문장들은 독자들이 숨죽이고 그 여정에 동참하게 만든다.
스웨덴 한림원은 포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기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한다”고 평했다. 포세는 “침묵도 언어다”라고 말했다. 포세는 극작품에서 ‘사이’를 많이 등장시키며 침묵을 표현해왔는데, <샤이닝>에서도 “너무나 조용해서 손에 만져질 것 같은 침묵”이 작품 전반을 감싼다.
소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삶에 관한 신비로운 우화 같기도 하다. 우리도 삶의 갈림길에서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하며 방황하고 헤매기도 한다. 어쩌면 어이지는 선택과 그 결과 속에 헤매는 것이 인생일 수 있다. 남자가 마주친 순백색의 빛나는 존재가 삶의 신비와 신성과 같은 것이라면, 검은색 양복을 입은 얼굴이 없는 남자는 삶의 공허를 나타내는 듯도 하다. 남자는 환영 속에서 ‘공백이며 무’와 같은 빛 속으로 들어간다.
80쪽이 되지 않는 짧은 소설이지만 12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 <7부작>의 압축판으로 평가받는다. 희곡 <검은 숲속에서>로도 펴내 무대에 올랐다. 읽기 쉽지만 동시에 쉽지 않은 책이다. 숨죽이며 남자의 독백을 따라가다보면 삶 속에서 길을 잃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포세가 선물한 ‘침묵’에 귀기울이는 순간을 맞을 수 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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