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 "나의 20대"·박학기 '눈물'…학전의 마지막은 외롭지 않았다 [현장+]

김수영 2024. 3. 14.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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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전, 오는 15일 폐관
33년 여정 마치고 역사 뒤안길로
박학기·황정민 등 마지막 공연
"김민기 대표 감사하다고…행복한 추억되길"
사진=뉴스1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세요~"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학전블루 소극장은 관객맞이로 분주했다. 젊은 학생부터 노부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공연장 주변, 로비 곳곳을 연신 카메라에 담았다. 스태프들은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조용히 "파이팅"을 외쳤다. 어딘가 비장하기까지 한 학전 마지막 날의 풍경이다.

폐관을 하루 앞둔 이날 공연은 그간 학전을 이끌어온 김민기 대표 트리뷰트 무대로 꾸며졌다. 박학기를 비롯해 권진원, 노찾사, 알리, 정동하가 무대에 올라 김 대표의 곡을 불렀다.

'철망 앞에서'로 포문을 연 노찾사는 "올해로 노래한 지 40년이 됐다. 김민기 선배님 덕분에 오래 노래할 수 있었다. 노찾사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1집 음반도 기획해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강변에서', '길'을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소화했다.

공연의 총감독인 박학기는 '친구'를 부른 뒤 "마지막 공연이라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한다"면서도 "수많은 공연 중 하나라는 마음으로 편하게 즐겨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통기타를 메고 노래한 그는 '가을 편지'까지 불러 긴 여운을 남겼다.

권진원은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공장의 불빛'을 가창했다. 그는 "김민기 선배님의 노래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분"이라면서 "제 음악 인생에 등불이 되어주신 분이다. 이렇게 많은 분께 힘이 되고 용기를 주신 아름다운 분이다. 존경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택한 곡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곡을 시작하려던 권진원은 감정이 북받친 듯 잠시 뒤를 돌아 마음을 추슬렀다. '이 세상 어딘가에'를 부르던 도중에는 배우 황정민이 등장해 듀엣을 선보였다. 학전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배우로 그는 '학전의 독수리 5형제' 멤버이기도 했다. 알리는 '바다'·'백구'·'상록수'를 가창했고, 정동하는 '천리길'·'새벽길'·'내 나라 내 겨레'를 불렀다.

사진=김수영 기자


33년간 대학로를 지켜온 소극장 학전은 다음 날인 15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배울 학(學)에 밭 전(田). 1991년 3월 15일 개관한 학전은 이름이 지닌 뜻 그대로 오랜 시간 국내 공연예술인들의 못자리가 되어줬다. 지난 33년간 이곳에서 기획·제작한 작품은 총 359개. '학전의 독수리 5형제'로 불렸던 이들이 황정민, 설경구, 장현성, 김윤석, 조승우였던 것만 봐도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 학전을 배움터로 삼아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라이브 공연은 학전의 뿌리였고, 그 위에서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꽃을 피웠다.

학전이 개관할 당시는 가요계에 서태지와 아이돌 열풍이 불어 '보는 음악'으로의 변화를 가져오던 때였다. 그 가운데 학전은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듣는 음악'의 매력을 지키는 공간이었다. 고(故) 김광석을 비롯해 노영심, 안치환, 노래를 찾는 사람들, 동물원, 강산에, 여행스케치, 빛과 소금, 이소라, 윤도현, 유리상자 등이 공연하며 대학로에 라이브 콘서트 문화를 정착시켰다. 김광석이 1000회 공연을 한 곳도 바로 학전이었다.

1994년에는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무대에 올랐다. 한국 뮤지컬 최초로 라이브 연주를 선보인 작품이었다. 이 밖에도 '모스키토', '의형제' 등의 뮤지컬이 탄생했다. 4000회 공연에 누적 관객 70만명을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지하철 1호선'은 2008년 돌연 중단됐다. 수익성이 현저히 낮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필요성이 높은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공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다. 2004년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올해 초까지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등의 어린이 공연을 선보였다.

설경구는 학전에서 포스터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다 '지하철 1호선'에 캐스팅되어 본격적인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윤도현과 유리상자는 학전에서 첫 공연을 열었다. '월드 클래스' 재즈보컬 나윤선은 학전에서 데뷔했고, 영화 '기생충'의 음악감독 정재일은 이곳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던 경력이 있다. 공연예술의 산실로써의 역할에 충실해온 학전에서 많은 배우와 가수들이 초석을 다져 현재의 대중문화를 이끌고 있다.

2009년 9월 학전에서 뮤지컬 '의형제'로 데뷔한 조승우는 지난 1월 열린 '뮤지컬어워즈'에서 "학전에서 많은 걸 배웠다. 21살 아무것도 모르는 때에 무대가 줄 수 있는 감동을 알고 마음 깊이 새겼다. 학전은 배움의 터전이었고 집 같은 곳이었고 추억의 장소였다. 김민기 선생님은 나에게 스승님이자 아버지이지 친구이자 가장 친하고 편안한 동료였다"며 "이 모든 상의 영광을 학전과 김민기 선생님께 바치겠다"고 했다.

사진=연합뉴스


김 대표는 재정난에 시달리면서도 배우들의 출연료를 빠짐없이 챙겼고, 개런티까지 챙겨주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설경구는 "은인 같은 분이 아니라 은인"이라고 표현했고, 박학기는 "김민기 대표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학전에 함께한 모든 사람은 감사한 마음이 있다"고 했다.

대학로 극장에서 무대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강모 씨는 "김 대표님이 극단을 만들 때의 운영 방식이 그 옛날임에도 현대식이었다. 수익을 극단 배우들과 나눴다. 선생님보다 더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학전 소극장을 재정비해 정체성을 계승하는 공간으로 운영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김 대표는 뜻을 잇되 학전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모두 다 그저 감사하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남겼다. 이에 따라 폐관 이후 기존 공간은 예술위가 운영하게 될 전망이다. 공모를 통해 민간단체에 공연장 운영을 위탁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다.

강 씨는 "대학로를 대표하던 곳들의 이름이 사라지고 있어서 안타깝다. 대학로 공연도 과거와 비교해 많이 줄었다. 극단은 점점 어렵고 대형 공연만 많아지니 소극장 문화가 발전하기 어려운 것"이라면서 "다양한 장르를 볼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는 게 현실"이라고 짚었다.

김 대표는 현재 암 투병 중으로 '학전 어게인 콘서트'에 함께하지 못했다. 대신 학전의 마지막 길을 설경구, 장현성, 황정민, 이정은, 크라잉넛, 웅산밴드, 노찾사, 동물원, 김필, 이한철밴드, 박창근, 박학기, 시인과 촌장, 루시, 오존, 권진원, 유리상자, 다섯손가락 이두헌, 데이브레이크, 알리, 하림, 자전거탄풍경, 장필순, 김현철, 한상원밴드, 한동준, 윤종신, 김재환, 왁스 등이 함께 했다.

황정민은 "학전은 나의 20대를 오롯이 보낸 곳"이라면서 "'지하철 1호선' 첫 회 공연에 관객이 20~30명이었다. 쫄딱 망했다. 김광석 형이 공연하면 내가 나가서 티켓도 팔고 관객분들한테 자리도 안내하곤 했다. 나의 20대는 여기서 먹고 자고 웃고 울었다"고 추억했다.

이어 김 대표를 언급하며 "늘 기본에 충실하라고 했다. 박자 세는 것부터 가르치셨다. 열정으로 똘똘 뭉쳤을 때라 얼마나 속에서 천불이 났겠느냐. 그땐 이미 아는 걸 왜 또다시 해야 하느냐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영화를 하는 지금,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겠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학전이 없어진다는 게 슬프지만, 내 마음에는 평생 학전이 있을 거다. 작품을 하는 원동력이자 초심이다. 여러분들도 다음에 내 작품을 보면서 학전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을 기록했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아쉬움과 격려의 의미를 담은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결코 외롭지 않은 마지막이었다.

출연자들은 엔딩 곡으로 '아침 이슬'을 불렀다. 박학기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는 김 대표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고 전하면서 "오늘이 평생 기억될 추억의 한 자리가 될 거라 생각한다. 모두에게 행복한 자리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비록 학전이라는 이름의 공간은 사라지지만, 이곳이 남긴 가치와 역사는 예술인들뿐만 아니라 함께 공연을 즐기고 추억을 쌓았던 관객들의 마음속에도 깊게 자리 잡을 전망이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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