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아사리판
총선을 앞둔 정치가 문자 그대로 ‘아사리판’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은 그야말로 ‘이판사판’이다. 낮은 국정 지지도와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사건으로 총선 참패가 예상되었었다. 4월 총선이 또다시 여소야대 국회로 귀착되면 남은 임기 동안에 가시밭길을 걷게 될 대통령 입장에서는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닌 듯하다. 대통령이 ‘민생토론회’라는 명목으로 이처럼 노골적으로 선거판에 뛰어든 적이 과연 있었던가? 또 아사리판의 틈을 타서,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에 외압을 행사한 피의자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을 호주대사로 임명해 출국하도록 했다.
의대 정원을 매년 2000명씩 늘리겠다는 승부수도 띄웠다. 의대 정원의 획기적 확대는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사들의 집단적 반발이 불을 보듯이 뻔했고 3월1일이 인턴·전공의·전임의의 재계약이 이뤄지는 시점임을 감안하면, 정부가 이처럼 밀어붙이는 것은 4월 총선이라는 타이밍을 빼고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의대 정원 확대와 의사들의 집단적 반발은 모든 이슈를 집어삼켰고, 여당에 유리한 선거 환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삼는 정치적 도박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야당인 민주당 역시 아사리판이다. 비상식적 공천으로, 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총선을 질 것 같은 선거판으로 바꿔버렸다. 의정활동에 대한 객관적 평가나 시민사회의 의원 평가와 동떨어진 공천을 하면서도 시스템 공천이고 혁신 공천이라고 주장한다. 개혁적 입법 활동을 해온 박용진 의원과 이용우 의원이 공천을 받지 못한 반면에, 반개혁적 입법 활동으로 지탄을 받아온 의원과 현대차그룹 대관업무를 총괄했던 사람은 공천을 받았다.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공천인가?
민주당은 이런 무리수를 둬도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정권견제 여론으로 다수당을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니, 정책 비전 제시는 고사하고, 의대 정원 확대와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우왕좌왕 기회주의적 단편적 대응에 그치고 있다. 역시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윤석열 정부가 싫으면 차악인 우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정치적 도박을 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번 총선에는 정책 이슈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책 이슈가 없어서 선거에서 정책 경쟁이 실종된 것은 아니다. 사실 중요한 정책 현안과 미래 문제는 차고 넘친다. 유행가 가사보다 더 언론에서 언급되는 저출생 문제부터 양극화, 제조업 위기, 탄소중립 이행까지 중요하고 시급하게 다뤄야 할 문제가 차고 넘친다.
그렇다면, 공천이 끝나고 본격적인 선거판이 펼쳐질 남은 4주 미만의 기간에 정책 선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 표가 된다면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선택과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전략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거악 대신에 차악인 자신을 선택하라는 대국민 겁박만이 난무할 것이다.
도대체 우리 정치는 어디서 무엇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것일까? 그런데 정치가 아사리판이 된 것은 정치인만의 잘못은 아니다. 언론답지 않은 언론, 지식인 같지 않은 지식인, 무기력증에 빠진 국민 다수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런 아사리판 정치를 어디서 무엇부터 고쳐야 할지는 자명하다. 선거와 정당 제도는 정치라는 게임의 규칙을 정한다. 작년에 국회의원 선거제 개편을 통해 정책 경쟁을 유인하자는 수많은 논의가 있었다. 국회도 어느 때보다 전향적 자세를 보이는 듯했다. 국회의원 전원위원회가 열렸고, 국민 숙의를 위한 공론화조사도 이뤄졌다. 그러나 기득권 양당의 구미에 맞지 않는 비례대표 의원 비중의 대폭 확대와 같은 공론화 조사 결과는 무시되었고, 종국에는 뻔뻔스럽게 위성정당을 만들어 연동형 비례대표 제도를 능멸하는 데 여야가 끈끈한 공조를 보여줬다.
국회에 선거제도 개편을 맡겨서는 바뀔 수 없다는 게 작년 선거제도 개편 논의의 결론이 아닐까? 1990년대 선거제도 개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뉴질랜드의 경험을 보더라도, 결국 중립적인 전문가들이 주축이 된 독립위원회가 선거제도 개혁안을 만들고 이를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들이 최종 선택하게 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양당에 이를 공약하도록 요구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운동이 일어나야 하며, 또 언론과 지식인들이 정치권에 이를 요구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대통령도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도 야당 대표도 아닌 국민이다. 주인이 주인 노릇을 제대로 못하면, 겁박당하는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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