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역대급’ 선거와 ‘어쩔 건데’ 정치
‘역대급’. 몇 년 전부터 자주 쓰이는 인터넷 신조어다. 단어 구조상 ‘역대(그동안)에 준하는’ 정도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역대 최고 수준’의 의미로 쓰인다.
2년 전 이 ‘역대급’ 때문에 머리를 싸맨 기억이 있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란 표현이 그랬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안 쓸 수도 없었다. 한국 정치의 실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년 전 고민은 사소한 것이었다. 최근 정치권에 ‘역대급’들이 넘쳐나서다.
지난 11일 대표적인 비이재명계 박용진 의원의 탈락과 막말 논란의 정봉주 전 의원 공천으로 정점을 찍은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파동이 대표적이다. 이재명 대표는 “공천혁명”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일반 시민들은 이번 공천에 사심이 개입했으며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이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파로 찍힌 이들은 어김없이 잘려나간 반면, 이 대표 호위무사를 자처한 이들은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면서 ‘비명횡사 친명횡재’ 논란을 키웠다. 민주당 주변에선 “이 대표가 이럴 줄 몰랐냐”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하냐”는 반응이 혼재했다.
그 여파는 ‘잡음’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의석수 과반 확보를 장담하던 민주당은 지지자와 무당파들의 이탈표를 걱정하게 됐다. 야권 대표주자로서의 이 대표 리더십도 훼손됐다. 정권심판 여론에는 큰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생긴 일이다. “국민들께서 수긍하고 무릎 칠 때가 올 것”(안규백 민주당 전략공천관리위원장)이라고 했지만, 무릎 대신 가슴을 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민주당 공천 파동에 가렸지만, 국민의힘 공천도 그 못지않다. 현역 중진들의 불패 신화가 이어졌고, 친윤석열계가 공천에서 배제된 사례는 드물었다. 인요한 혁신위원장의 ‘윤핵관·중진 희생’ 요구는 정치쇼로 끝났다.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안 재투표에서 이탈표를 막기 위해 현역 물갈이를 최소화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퇴행적 모습도 나타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들을 공천해놓고 “탄핵의 강은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라고 했다.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도태우 후보의 공천을 유지하기로 하면서 “국민 눈높이에 맞는 결정” “다양성 존중”이라고 했다.
여야 모두 감동도, 비전도, 인물도 없다는 점에서도 ‘역대급’이다. 이번 총선이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설명이 없다. 이번처럼 정책이 안 보이는 선거도 없다. 참신한 인물은커녕 막말과 비리 후보들이 즐비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스템 공천, 너희는 막장 공천” 공방만 벌이고 있다. ‘구정물 공천’ ‘섞은 물 공천’ ‘패륜 공천’ 등 서로에게 내뱉는 말들도 갈수록 태산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라는 식이다.
여야만 그런 게 아니다. 윤 대통령은 올 들어 20차례에 걸친 전국 순회 민생토론회에서 감세·규제완화·지역개발 등 정책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언제는 ‘좌파 포퓰리즘’을 비판하더니 한술 더 뜬다. “대통령이 여당 총선의 1호 영업사원이냐”는 비판도, 공정한 선거관리를 해야 할 대통령으로서 삼가야 한다는 보수언론의 조언도 귓등으로 듣는다.
한편에선 윤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경호실에서 국회의원, 카이스트 졸업생, 의사를 ‘입틀막’ 했다. 정부·여당은 ‘김건희 특검법’에 ‘여사님’ 호칭을 안 붙였다고, 미세먼지 농도를 나타낸 ‘파란색 1’이 민주당을 연상시킨다고 언론을 겁박한다.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 사건의 피의자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도피성 출국을 한 데선 기가 찬다. 그야말로 ‘어쩔 건데’ 통치를 대놓고 시연하고 있다.
극단과 대결의 정치를 끊어내지 못한 후과는 ‘역대급’을 단 그로테스크한 상황들로 나타나고 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부터 시작해 정치권에 대화와 통합, 토론과 숙의라는 정치 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상대를 죽이려는 정치적 쟁투만 난무한다. 그 과정에서 민생과 양극화, 저출생과 저성장, 기후 위기와 한반도 위기 등 현안들은 뒤로 밀렸다.
어떻게 해야 역대급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총선까지 4주가 채 안 남았다.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에 그나마 ‘덜 나쁜 놈’을 고르는 게, 아니 ‘더 나쁜 놈’을 떨어뜨리는 게 현명한 선택일까. 분명한 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가짜 감별사들의 정치를 끝내는 것도 유권자들 몫이라는 사실이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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