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파이의 날, 3월14일의 몽상
‘가다’와 ‘내려가다’는 뉘앙스가 다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 “가다=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이동하다/내려가다=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또는 위에서 아래로 가다.” 두 단어를 살피면, ‘가다’는 수평으로 나아가는 동작을 포착하고 ‘내려가다’는 수직으로 구르는 모양을 그린다고 할 수 있겠다.
왕자웨이의 영화 <일대종사>는 인상적인 문장들로 시작한다. “쿵후는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수평과 수직! 지는 자는 수평이 된다. 최후에 수직으로 서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어디 쿵후만 그렇겠는가. 나날의 삶도 낮에 막대기처럼 서서 돌아다니다가 밤에 누워 자는 것. 그러다가 꿈속에라도 나무 곁으로 내려가 꼿꼿이 직립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니 이 범주에 속한다 하겠다.
플라톤의 <국가>는 소크라테스의 말로 시작한다. “어제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 항에 내려갔었네.” 이 문장의 그리스어 원문엔 ‘내려갔었네’가 첫 단어인데 이건 마치 <논어>의 첫 글자가 ‘學(학)’인 것처럼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나는 철학에 관해선 비참한 수준이라 그 밑천이 들통나기 전 여기선 여기까지만.
지구에는 골목이 많고, 몸에는 계단이 많다. 그러기에 기하학과 정신분석학이 발달했으리라. 하루에 한 번씩 어둠이 지붕을 덮치더니, 어느 날엔 몸 안에서 그림자가 계단을 밟고 올라온다. 그날에 대비하듯 이제 정성껏 내려가는, 먼지처럼 낮아지는 연습을 하자. 누에도 때가 되면 곡기를 끊고 실을 뽑아내면서 스스로를 둥글게 마무리하지 않는가.
3월14일은 파이(π)의 날. 기원전 발견돼 아직도 그 정체를 다 알 수 없는 원주율. 어설픈 두뇌 운동의 일환이라도 되는 듯 하루 한 자리씩 파이의 숫자를 쓰고 외우자는 결심을 한 지 며칠째. 소수점 아래로 숫자를 더해가는 건 오르는 게 아니라 무한히 긴 길을 내려가는 행위다. 수평과 수직을 하나로 허물며 원의 아름다움으로 수렴되는 길. 둥근 이마를 짚으며 생의 둘레를 가늠하는 일. ‘가다’도 편하나 ‘내려가다’는 더욱 편안해 곧 그 어떤 아늑함에 닿을 것만 같아 칠판 같은 너의 이마에도 적어주고 싶은, π=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2884197169399375105820…….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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