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비누도, 쓸모없는 먼지도, 잊혀졌던 백자도…그의 셔터 아래선 아름다움을 고백한다
'구본창의 항해'를 마치며
유명한 달항아리 사진부터
필름 긁는 등 파격 작품까지
50년 삶 담은 대규모 회고전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 속에서
'진정한 美' 찾는 방법 알려줘
11만 명.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지난 10일 막을 내린 ‘구본창의 항해(Voyage)’ 전시를 본 관람객 수다. 지난해 12월 14일 개막해 약 3개월간 열렸으니, 매일 1400명가량이 다녀간 셈이다. 1988년 미술관 개관 이후 생존작가 전시로는 하루평균 최다 관람객 수 기록이다. 관람 시간은 보통 3~4시간, 한 번에 도저히 다 못 봤다거나 또 보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 마지막 날까지 ‘N차 관람 열풍’도 불었다. 하루 한 번 현장 모집으로 열리는 전시 해설 프로그램엔 50명씩 몰렸다. 수집품 600점, 작품 500점 등 1100점이 전시됐으니 어쩌면 예고된 흥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구본창의 항해’ 전시가 우리에게 남긴 건 이렇듯 곧 휘발해버릴 숫자만이 아니다. 한 사람이 40년 넘게 일생을 던져 수집한 예술적 성취, 오직 카메라를 들었기에 넘나들 수 있었던 장르의 경계, 무엇보다 쓸모를 다하거나 잊혔던 것들에 다시 숨을 불어넣은 사진가의 연민이 그곳에 있었다. “구본창의 사물 사진은-아름다움을 고백한다”(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평론의 문장처럼, 작가의 항해에 승선한 사람들은 모처럼 배웠다. 사소한 풍경과 평범한 사물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고 기억하는 방식을,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파격과 실험 -사진이 아닌 사진들
이번 전시는 구본창 작가의 국내 첫 공립미술관 개인전이었다. 71세의 사진가, 일찌감치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그가 여태 공공 미술관에서 개인전 한 번 연 적 없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미술계가 사진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시사하는 다소 씁쓸한 대목이기도 하다.
구본창 작가는 ‘달항아리 사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치 달이 뜨고 지듯 그의 ‘달항아리’는 흑과 백 사이의 무수한 색으로 차오르고 스러진다. 이 백자들은 서울은 물론 런던, 파리, 교토, 오사카, 뉴욕 등 전 세계 흩어져 있는 것들. 접근조차 어려운 유수의 박물관들을 모두 설득해 2004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이 작업은 지금의 ‘달항아리 신드롬’을 만든 시작이기도 하다. 유명 소장자들이 이제 “우리 것도 좀 찍어달라”고 먼저 찾아올 정도다.
‘달항아리 사진가’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은 이번 회고전에서 그의 초창기 작업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1980년대 말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기록’이라는 전통적 틀을 깨고 ‘주관적인 연출 사진’, 즉 메이킹 포토의 새 장을 열었다. 사진 위에 실과 천으로 콜라주를 하거나 인화지를 재봉틀로 꿰매고(아!대한민국·태초에 시리즈), 판화처럼 필름을 긁어내는가 하면(탈의기·기억의 회로 시리즈) 아예 인화된 사진 일부를 불에 그을리기도(재가 되어버린 이야기 시리즈) 했다. 사진이란 장르를 객관적 기록에서 주관적 예술로 확장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관찰과 통찰-존재하나 부재하는 것들
사람들은 전시장에서 내내 수군댔다. “이게 대체 사진이냐”고. 그 질문은 구본창 작가가 1980년대 말 동료 선후배와 미술계에서 가장 많이 듣던 말이기도 하다. 그때와 지금 사람들은 같은 질문을 던지지만, 맥락은 다르다. 과거의 물음은 ‘이렇게 찍은 게 어떻게 사진이냐’는 비난의 일부였다면, 지금은 ‘그때 (아날로그로) 어떻게 이런 사진을 만들었느냐’는 경이의 표현이다.
구본창의 사진 한 장에서 사람들은 초현실 회화와 공예, 조각과 현대미술, 수묵화와 정물화까지 모든 장르의 예술을 떠올린다. 그의 이런 세계를 만든 건 어린 시절. 3남3녀의 다섯째로 태어나 집안에서 늘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던, 지극히 내성적이던 한 소년은 외국 잡지부터 신문 기사, 버려진 돌과 빈 병까지 그저 모았다. 손에 들어온 도록과 명화 포스터는 몇 시간이고 혼자 앉아 따라 그렸다. 핀잔과 꾸중을 들으면서도 수집은 계속했다.
“버려지고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은 아마 ‘나도 버려져 있다는 어린 시절의 불만’에서 표출된 것 같다”는 게 그의 솔직한 고백. 좋게 말하면 수집가, 거칠게 말하면 고물상과 다름없던 그의 습관은 이후 사라질 일만 남은 비누, 벽 모서리에 남은 먼지,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던 백자까지 사진 속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힘이 됐다. 존재하지만 부재했던 사물들이 그의 셔터와 함께 새 삶을 얻었다.
수집과 기록-나에게서 우리로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품과 영화 포스터 등 상업예술을 넘나들던 30대, 정적이고 관조적인 풍경들을 담아낸 40대, 그리고 한국의 전통 문화와 문화재-탈과 곱돌, 백자, 황금 시리즈-에 매달린 50대 이후까지 구본창 작가의 작품 세계를 망라하면 결국 우리 모두의 인생으로 귀결된다. 삶의 연대기 속에서, 그저 표현과 기록의 방식이 달랐을 뿐 비슷한 생각의 궤적을 지녔던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시간이 지나 소멸해버리는 것들을 붙잡아온 그의 시선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향했다. 일찍이 어머니의 죽음을 독일 유학 시절 ‘일분 간의 독백’으로 남긴 그는 임종 직전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숨’ 연작으로도 이어졌다. 탈북민 소장품 연작,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을 기록하는 그의 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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